모든 예술이 그렇겠지만 건축은 (건축을 예술의 범주에 넣는다면) 특히나 환경과 생활을 포함한 시대상을 반영하는 분야라고 할 수 있다.
20세기가 시작되던 시기는 세계대전이 끝난 직후 폐허에서 많은 사람들이 생활해야 하는 도시건축의 필요성이 대두되었던 때였다. 현대건축의 아버지라 불리는 르 코르뷔지에는 건물 하중을 벽이 아닌 기둥이 받게 하여 빠르게 지을 수 있고 공간 활용이 자유로운 콘크리트 구조인 dom-ino 시스템을 창조하였다.
동시대의 미국 건축가 프랭크 로이드 라이트는 당시 미국적인 환경에 맞추어 대초원 양식 (prairie style)이라는 미국 중부의 대평원에 어울리는 자연주의 건축을 만들었고 흐르는 폭포 위에 그 유명한 falling water라는 여름 별장을 건축했다.
어떤 건축가의 스타일과 작품에 대한 영향을 논할 때 여러 요인들이 있겠지만 환경과 시대라는 측면에서 이렇게 단순하게 말을 해볼 수도 있다.
그렇다면 21세기 한국의 건물은 어떤 공간이며 어떤 시대를 관통하고 있는가?
엄청나게 빠른 현대화와 산업 발달로 도시화되어버린 곳.
특히 서울이란 특별한 곳은 1/4의 인구가 집중된 공간일 뿐 아니라 요새 한참 시끄러운 집값마저 그야말로 지방에서는 상상할 수 없는 그런 곳이 되어 버린 땅이다. 열심히 노력해 발전 속도가 빠르기도 하지만 유행이 지난 것을 쉽게 바꿔버리는 우리의 성향으로 인해 이제는 불과 몇십 년 전 어린 시절 추억을 찾아보기 어려운 곳이 아닌가 싶다.
새로운 건축보다는 다른 가치가 필요한 현재.
감히 이런 거대한 주제를 언급할 능력은 전혀 안되므로 지방 소도시 군산에서 진행되고 있는 하나의 프로젝트를 소개할 까 한다. 경주나 전주처럼 역사적으로 유명한 곳도 아니고 울산이나 구미처럼 산업이 발달한 곳도 아니며 무주나 강릉처럼 자연경관이 발달한 곳도 아닌 애매한 지방도시. 그러나 자세히 들여다보면 우리나라의 근대 시절 아픔과 역사를 간직하고 있는 곳이 바로 군산이라는 도시이다.
기억하는 분들이 있을지 모르겠는데 <8월의 크리스마스>에서 다림이 사진관 주인 정원을 만나러 다니던 동네이자 장율 감독의 <군산: 거위를 노래하다>에서는 아예 주인공이 되어버린 곳이다. https://youtu.be/x3Ts-yxrJAw
군산에서 지역 문화를 활성화시키고자 꾸준하게 노력해 왔던 몇 명의 사람들이 이번에는 군산 구도심 한가 둔 데에서 새로운 일을 벌이고 있다. 도심의 오래된 건물을 사서 허물어버리고 화려한 새 건물을 지으려고 하는 게 아니라, 일제시대의 잔재라며 허물어버리는 적폐 청산 퍼포먼스가 아니라, 그들이 살았었던, 그리고 지금은 숨이 꺼져가는 공간을 앞으로도 살아갈 살아있는 공간으로 만들어보자는 것이다.
<Returning>
2019년 11월 9일부터 23일까지 군산시 영화동 17-15의 옛 건물 내에서는 <Returning>이라는 설치미술 전시가 열리고 있다. 군산보다 더 유명한 이성당 빵집을 지나 두 블록쯤 걸어가다 보면 익숙하고 푸근한 내가 어릴 때 살았던 것 같은 그런 거리가 나온다.
전시 제목이 새겨져 있는 철제문을 열고 들어가 좁은 길을 잠깐 걸어가면 그다지 넓지 않은 정방형의 마당이 나오고, 오늘은 특별히 와인을 한잔 하면서 전시를 감상하는 호사를 누릴 수 있다. 수십 년간 살아오던 사람들이 떠나고 폐허처럼 변해버린 여러 채의 작은 집들이 이 마당을 중심으로 위치해 있다.
이 건물들의 안과 밖에, 지붕, 기둥, 그리고 남아있는 벽체를 이용해 여러 현대미술가들이 자신들의 작품을 정성껏 설치해 놓았고 빛이 있는 시간과 어두워진 시간에 보는 느낌이 다르게 다가온다. 별 것도 아닌 설치미술이라고 느끼는 사람도 있겠지만 설치미술과 함께 여러 옛 가옥이 옹기종기 모여있는 이 공간 자체가 설치미술의 하나로 느껴진다.
다시 길거리로 나와서 보면 사거리 코너에 전시 오픈 공연이 열리는 장소의 입구가 나온다.
이 공간은 앞으로 이 동네가 재생되면 재즈공연장으로탈바꿈할곳이다. 창업 관리단에 급한 일이 생겨 예정된 부산 편집회의를 못 가고 익산으로 왔는데, 덕분에 이날 공연을 감상할 수 있었다.
금강산도 식후경이라고, 우선 그 옆에 알맞게 딱 자리 잡은 명동 칼국수에서 뜨근하고 구수한 칼국수 한 그릇을 서비스받았다. 곧 SNS를 통해 난리가 날 것이라는 것을 쉽게 예상할 수 있다.
해가지고 어둑해지고 날씨도 차가워져 음악을 듣기에 딱 좋은 시간이 되자 이 프로젝트를 진두지휘하고 있는 파라디소 송성진 사장의 인사말로 공연을 시작한다. 재즈피아니스 임인건, 첼리스트 송상우, 포크가수 김두수, 소리꾼 김금희 모두 군산에 적을 두고 있는 예술가들이 들려주는 음악은 피아노와 첼로, 포크 음악까지 허름하지만 아늑한 공연장에 너무나 잘 어울렸다. 의외의 발견은 판소리도 이런 공간에서 관객과 같이 소통할 수 있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판소리야말로 국악한마당 같은 거창한 프로그램보다 사람들과 같이 부르고 웃을 수 있는 이런 동네의 공연장이 필요한 게 아닌가 싶다.
전시를 감상하면서 오래된 폐허 공장지대를 벽화의 성지로 바꾸어 놓은 마이애미의 Wynwood walls가,
그리고 공연을 보면서 술집이었던 곳이 61년부터 재즈 공연장으로 바뀐 뉴올리언스의 Preservation hall이 연상되었다면 너무 과장된 것일까?
전 세계의 도시 재생의 모델 중에서 군산만의 독특함이 담겨 있는 이 프로젝트가 꼭 성공하기를 바라며, S 모 국회의원처럼 요란하고 난리법석을 피우지 않더라도 고향과 추억과 예술에 대한 열정이 가득한 사람들의 자발적 노력이 제일 중요하다는 것을 새삼 깨닫게 된다. 개인이 시작한 이런 물결에 이제 공공이나 대중이 화답할 때가 아닌가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