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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erendipity Dec 23. 2019

나이브스 아웃 Knives out (2019)

Rian Johnson 2019

별다른 오락거리가 없었고 팝송이나 영화도 아직 모르던 내 어린 시절을 지배한 것은 만화책과 함께 홈즈와 루팡이 등장하는 추리소설이었다.

의문의 살인사건이 비범한 탐정이 나타나 발생하고 누가, 왜, 어떻게 했는지 멋지게 해결하는 과정은 정말 흥미진진하다. 홈즈로 시작한 나의 추리소설 탐독기는 중고등학교 때까지 계속되면서 에드거 앨런 포의 오귀스트 뒤팽, 아가사 크리스티의 포와로와 미스 마플,  G.K. 체스터튼의 브라운 신부와 같은 유명 탐정들과 함께 범인을 잡으러 다녔다.

이렇게 뛰어난 논리로 추리하며 사건을 해결하는 탐정 등장하는 전통적인 추리 소설과 달리 레이먼드 챈들러로 대표되는 하드보일드 소설에서는 인생을 막 사는 것 같은 담배를 입에 물고 중절모와 바바리코트를 걸친 전형적인 주인공이 등장해 죽도록 고생을 하다가 범인을 잡는 방식을 보여준다. 이런 하드보일드 소설은 할리우드 영화에서 흔히 보는 전형적 누아르 장르의 뿌리이다.

최근 미드에서는 CSI와 같은 최신 과학기술로 무장한 전문가 집단이 범죄를 해결하는 방식이 유행하고 있다.


주말 심야시간에 관람한 <나이브스 아웃 Knives out>은 스타워즈 라스트 제다이를 감독한  Rian Johnson이 각본, 제작, 감독을 혼자 다 한 작품으로 미국 영화 답지 않게 오랜만에 만날 수 있었던 정통 탐정 영화였다.

 

대니얼 크레이그, 크리스 에반스,  돈  존슨,  크리스토퍼 플러머 등 익숙한 배우들이 등장해 그 연기를 보는 재미도 쏠쏠하지만, 역시 탐정이 등장하는 추리 영화는 이야기의 전개와 탐정의 활약, 그리고 마지막의 반전이 영화의 재미를 결정한다.


유명한 추리소설 작가 할런 트롬비가 85세 생일 파티 후 다음날 아침 시체로 발견된다. 자살인 것으로 생각되어 장례까지 치르게 되지만 알 수 없는 의뢰인으로부터 할런의 죽음을 조사해달라는 요청을 받은 탐정 브누아 블랑이 등장해 가족들을 면담하면서 영화는 시작된다.


엄청난 자산가인 할런의 유산을 둘러싸고 탐욕에 가득 찬 가족 간의 싸움과 예기치 못하게 사건에 얽혀버린 간병 간호사 마르타(아나 데 아르마스)의 이야기는 마치 애거서 크리스티의 소설을 보는 듯한 느낌이 든다. 제목 Knives out은 할런의 사인을 의미함과 동시에 서로 적의를 노골적으로 드러내 놓고 있는 할런 가족 간의 문제를 이중적으로 의미하는 것 같다.

요즈음은 영어 제목을 그대로 한글로 옮겨놓는 바람에 도대체 무슨 의미인지 알기가 어려운데, 과거처럼 멋진 우리말 제목을 붙여줬으면 하는 아쉬움이 항상 있다.


추리소설의 가장 기본적인 요소는 누가 범인인가에 대한 답을 증거에 기반하여 이성적이고 논리적인 추리과정을 통해 찾아내는 것인데 영어로 추리소설을 Whodunit (Who (had] done it)이라고 하는 것은 참 그럴듯하다.

이 영화에서는 초반부터 할런이 죽는 과정을 모두 알고 있는 마르타의 존재가 드러나고, 또 마르타가 거짓말을 하게 되면 구토를 한다는 설정으로 범인을 끝까지 숨겨놓는 기존 추리소설의 형식을 깨고 있다.

의학적으로 거짓말을 하면 구토를 하는 병은 없는데 brain-gut axis의 개념에서 스트레스나 불안 등은 울렁거림이나 구토의 원인이 되기도 하기 때문에 이야기 전개의 재미를 위해 감독이 이런 특별한 병을 만들어 낸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결국 이 영화 역시 그 마지막에는 또 다른 반전의 묘미가 있다.


추리 소설의 주인공은 역시 탐정이고 대니얼 크레이그는 007의 무게를 버리고 브누아 블랑이라는 탐정 역을 비교적 훌륭하게 연기한다. 영화가 시작할 때 의자에 다리를 꼬고 앉아 한 마디씩 툭툭 던지며 질문하는 모습으로 "나 탐정이야" 하고 등장하지만, 중간에 허당 같은 모습을 보이기도 한다. 그러나 마지막 결정적인 순간에 멋진 추리를 선보이며 이 영화를 장르적으로 완성시킨다.

 전통적인 탐정소설에는 홈즈의 왓슨이나 포와로의 헤이스팅즈와 같은 조수 혹은 동료가 등장하는데 브누아 블랑은 할런의 죽음과 직접 연관된 마르타에게 조수 역할을 해달라고 부탁함으로써 이런 클리셰를 이어간다.


영화의 엔딩 크레딧에서는 주인공들을 그린 삽화가 등장하는데 초기 탐정소설의 표지나 중간에 나오는 삽화들을 오마주한 것 같은 감독의 위트가 돋보인다.


영화 중간에 남미에서 불법 이민 온 마르타의 어머니가 집에서 TV를 보는 장면이 있는데, 이때 나오는 드라마는 한때 80년대 TV 인기 시리즈였던 <제시카의 추리극장>의 한 장면인 듯하다.


제시카는 마치 애거사 크리스티의 미스 마플과 같은 중년 여성 탐정이다.

Rian Johnson감독은 비록 영화의 스타일은 영국 추리소설에 더 가깝지만 미국에서도 이런 전통은 있었다 라는 웅변을 하는 것 같고, 또 73년생인 감독이 어린 시절 즐겨 보았던 TV 시리즈였을 수도 있다.


불현듯 어린 시절에 매주 기다려 보던 TV 시리즈 탐정물 들이 생각난다.

제시카의 추리극장도 당연히 재미있게 봤지만 <레밍턴 스틸>이나 <블루문 특급>은 남녀 주인공이 등장해 사건의 전개와 함께 두 주인공이 티격태격하거나 러브라인을 그려가는 모습을 보는 재미도 있었다.

재즈가수인 Al Jarreau의 주제곡으로 시작하는 블루문 특급과 https://youtu.be/xEV5ZP9Jzvg

영화음악가 Henri Mencini가 작곡한 레밍턴스틸의 주제곡이 흐르며 드라마가 시작될 때면

https://www.imdb.com/title/tt0083470/videoplayer/vi1338555673?ref_=tt_ov_vi

오늘은 과연 어떤 사건이 일어날까 하는 기대로 TV 앞에 누워있던 기억이 난다.


나의 첫 탐정인 셜록홈스의 작가인 코난 도일이 의사였던 것은 의미심장하다. 실제 환자를 보는 과정도 사건을 의뢰하러 온 사람의 외모와 말투에서 다양한 정보를 추리하고, 수집한 정보로 범인을 좁혀가 잡아내는 탐정의 역할과 비슷하다.

오죽하면 요새 가장 많이 들리는 용어가 evidence-based medicine이 아닌가!

훌륭한 탐정과 같은 의사가 되면 좋겠으나 눈치만 늘어가는 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아무튼 요즘 같이 영화가 일부 블록버스터에 편중되어 상영되고 금방 내려지는 시절에 아차 하면 극장에서 볼 기회가 없다. 이번 성탄절 밤에는 <나 홀로 집에>는 그만 보고 극장에 한번 가보시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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