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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erendipity May 03. 2019

Quinteto Astor Piazzola

콘서트장에서의 결정적 순간 (2019.5.1)

현대 사진에 큰 영향을 준 사진작가 앙리 카르티에 브레송은 <생 라자르 역 뒤에서 (1932)>라는 작품에서 고인 물 위를 건너 뛰어가는 사람이 마치 공중에 떠 있는 것 같은 모습을 카메라에 담아 "결정적 순간"이란 그의 사진 미학을 대표적으로 표현했다. 배경의 포스터에서 보이는 무용수의 포즈와 묘한 대조를 이루며 발로 물을 밟아 물보라를 일으키기 직전의 묘한 긴장감도 느끼게 해 준다.

음악 콘서트에서도 이런 "결정적 순간"이 있다. 

공연이 시작되기 직전 공연장.

무대 조명은 아직 약간 어둡고, 덩그러니 놓인 피아노와 몇 개의 의자들은 연주자들을 기다리고 있다.

객석으로 몇몇 뒤늦은 관객들이 들어오고 이미 자리를 잡은 관객들은 공연 브로셔를 뒤적이거나 행여 교양 없다는 소리를 들을까 봐 낮은 목소리로 소곤소곤 대화를 나누고 있어 시장통과는 다른 어수선함으로 충만하다. 

 


무대의 조명이 밝아지면 대화를 하던 관객들은 시선이 무대 쪽으로 모아지고 잠시 후 연주자들이 등장할 때 박수가 터져 나온다. 

연주자들이 각자의 자리를 잡고 나면 공연장 안은 갑자기 조용해진다. 
그야말로 절대적 침묵, 긴장의 순간이다. 
가끔은 어쩔 수 없는 기침 소리가 들리기도 하지만 그마저도 이 침묵의 순간을 훼방 놓을 수는 없다. 


바로 이 순간이 나에게는 "콘서트 장에서의 결정적 순간"이다. 


이 결정적 순의 정적을 과연 어떤 소리가 깰 것인가. 


온 관객의 눈과 귀가 무대로 집중되어 있을 때 마침내 생 라자르 역 뒤의 남자가 물을 밟아 물보라를 일으키는 것처럼 약간은 날카롭고 신경질적인 반도네온 소리가 정적을 깨고 다섯 개의 악기가 멋진 소리를 내준다.


2019년 5월 멀리 아르헨티나에서 피아졸라 재단의 공식 팀인 아스토르 피아졸라 퀸텟(Quinteto Astor Piazzola)의 내한공연이 있었다. 피아졸라 재단은 탱고를 예술의 차원으로 한 단계 격상시킨 피아졸라의 부인이 설립한 것으로 이 재단이 조직한 대표적인 음악 단체 중 하나가 이 퀸텟이다.  

한국을 처음 방문한 아스토르 피아졸라 퀸텟은 그 명성에 걸맞은 수준 높은 연주를 보여주었다. 


탱고를 콘서트홀에서 들은 것은 오늘이 처음이었는데 탱고라는 음악, 특히 피아졸라 이후 누에보 탱고는 긴장감이 충만한 음악이라는 것을 새삼 느낄 수 있었다. 


첫 번째 곡 항구의 여름(Verano Porteno)이 연주되는 동안 숨도 제대로 쉬지 못하고 듣고 있다가 연주가 끝나는 순간 "아!" 하는 탄성을 나도 모르게 흘리면서 박수를 치고 있었다. 
어찌나 숨을 살살 쉬고 있었는지 이때 산소포화도를 측정했다면 90%가 안 되었을 것 같다.

 적당히 반짝이는 적포도주색 정장에 검은색 셔츠를 받쳐 입고 단추를 몇 개 풀어놓아 남성미를 발산하는 훤칠한 미남 반도네온 연주자 Lautaro Greco가 센터에 있었다.

 Lautaro는 상자위에 올려놓은 오른쪽 다리에 반도네온을 받쳐서 한 시간이 넘도록 말 한마디 없이 엄청난 연주를 보여주었다. 반도네온이라는 악기는 구슬프기도 하고 강렬하기도 하고 감미롭기도 한 정말 다양한 색깔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훌륭하게 보여주었는데, 연주하기 매우 어려운 이 악기의 폭넓은 음역을 활용하면서 화려한 테크닉을 선보였다.

 클라이맥스에서 악기를 끌어안고 다리를 구부리고 몸을 비틀어가며 연주하는 모습이 들려주는 소리만큼이나 멋있었는데, 개인적으로 근골격계 직업병을 앓고 있는 사람으로서 연주를 보던 중에 그 연주자의 양팔, 손목, 허리, 무릎관절과 햄스트링이 좀 걱정되었다. 

피아졸라 퀸텟 내한공연 브로셔 중

 이에 질세라 처연한 음색과 다양한 테크닉을 보여준 바이올린 연주자 Sebatian Prusak의 소리가 범상치 않아 프로필을 보니 클래식으로 훈련된 배경이 아주 화려하다.  어떤 부분에서는 Chris Botti의 보스턴 콘서트에서 "Emmanuel"을 같이 연주한 Lucia Micarelli가 생각나는 음색이었다.  

피아졸라 퀸텟 내한공연 브로셔 중

 반도네온은 하모니카와 같은 울림판을 공기로 울려 소리를 내는 것이고 바이올린도 현을 활로 켜서 소리를 내는 악기여서 두 악기가 멜로디를 담당하고 음색도 가끔 비슷하게 나는 것 같다. 오늘 공연에서는 같은 음으로 멜로디를 받아 이어갈 때는  어떤 악기 소리인지 구분이 어려울 때도 있었다. 


 멜로디를 구성하는 이 두 악기 외에 해머로 현을 치는 피아노(Christian Zarate),  현을 튕기는 콘트라베이스(Sergio Rivas)나 현을 스트로크로 치는 기타(German Martinez)로 구성된 퀸텟이었는데 이 세 악기는 뒤를 든든히 받쳐주는 역할에 충실했지만 그 중요성이 결코 작지는 않았다. 

 오늘 연주의 또 하나의 볼거리는 국악과의 협연이었다. 
 해금은 활로 현을 켜는 연주 방식이나 음색이 구슬프기로 말하면 절대 뒤지지 않는, 어쩌면 탱고와 가장 잘 어울리는 국악기라고 할 수 있다. 공연 중간에 해금 연주가 강은일이 피아졸라 퀸텟과 같이 Oblivion을 들려주었고, 앙코르 공연 때도 Libertango를 같이 연주해서 피아졸라의 대표적인 두 곡을 국악기로 들을 수 있었던 매우 색다른 연주였다. 

피아졸라 퀸텟 내한공연 브로셔 중

 뛰어난 연주 실력에 관객들은 우레와 같은 박수를 보냈고, 연주자들은 이에 대한 보답으로 앙코르를 3곡이나 선사했다. 

 공연 후 사인회가 있었는데 이제 나도 나이를 좀 먹었는지, 아니면 같이 갔던 분이 당황할 것이라고 생각했는지 줄까지 서서 기다리고 싶은 생각이 들지 않았다. 

 오랜만에 귀가 뻥 뚫리는 것 같은 연주를 감상하고 집에 오면서 연주자들의 멋진 모습과 의상이 자꾸 생각난다.

그러다가 집에 올 때쯤에는 다음 학회 강의 때는 나도 적포도주 반짝이 정장에 검은색 셔츠를 받쳐 입고 단추를 한두 개 푼 상태로 연단에 올라가 볼까 하는 실없는 생각으로 마무리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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