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Serendipity Feb 18. 2020

졸업 The Graduate (1967)

1967년작 Mike Nichols 감독의 졸업 (The Graduate)을 드디어 감상할 기회를 가졌다. 워낙 유명한 영화라 줄거리도 다 알고 유명한 장면들도 중간중간 봤었지만, 어두운 극장에서 스크린으로 전체 영화를 다 봐야 진짜 본 것이라고 할 수 있기 때문에 이제 어디 가서 “나 그 영화 봤는데”라고 말할 수 있겠다. 

콜로세움 같은 고대의 유적이나 모나리자 같은 명화를 직접 눈으로 보는 순간 가치 있는 것을 감상한다는 흥분과는 별개로 동시에 어릴 때부터 책에서만 보고 들어오면서 그 본질과 관계없이 내 머릿속에 특정 이미지로 자리 잡고 있던 것의 실체를 마주한다는 특별한 감정을 느끼게 된다. 


과연 이게 그동안 내가 상상하고 기대했던 그것인가? 


하얀 천 배경에 무표정하고 기운이 없어 보이는 청년의 얼굴 클로즈업으로 영화는 시작한다. 

침대에 누워 있는 것처럼 보이기도 했으나 줌아웃이 되면서 비행기 좌석에 앉아있는 것을 알 수 있다. LAX를 빠져나오면서 스쳐 지나가는 사람들을 멍하니 쳐다보는 주인공 옆으로 제목이 나타난다. 

The Graduate

동부의 명문 대학을 훌륭한 성적으로 졸업하고 LA로 돌아온 21살 벤자민은 가족과 주변의 많은 기대를 받고 있지만 정작 본인은 불확실한 미래에 대한 고민에 빠진 채 뭘 해야 할지 모른다. 그러던 중 아버지의 동업자의 부인으로 어릴 때부터 알고 지냈던 로빈슨 부인의 치명적인 유혹에 서서히 빠져들게 된다. 

그러나 벤자민이 버클리 대학을 다니는 로빈슨 부인의 딸 엘레인이 돌아왔을 때 사랑에 빠지면서 일이 꼬이기 시작한다. 급기야 로빈슨 부인과의 관계도 드러나게 되고 엘레인은 다시 버클리로 돌아간다. 다시 무기력한 생활로 돌아갔던 벤자민은 사랑을 찾아 엘레인을 찾아가고, 영화의 끝에서는 의과대학생과 결혼하려던 엘레인을 데리고 결혼식장에 도망치는 그 유명한 엔딩신을 만날 수 있다.


사실 영화의 후반부는 벤자민과 엘레인이 결혼식에서 도망갈 만큼 깊은 사랑을 했는지 좀 이해가 어려울 정도로 어리숙하게 진행이 된다. 오히려 전반부의 벤자민과 로빈슨 부인 사이이 미묘하게 밀고 당기는 사건들이 더 긴장감이 있고 그럴듯하다. 

그런 의미에서 이 영화에서 가장 인상 깊은 연기를 펼친 배우는 로빈슨 부인 역의 앤 밴크로프트라고 할 수 있다.

 젊은 시절의 꿈을 다 잃어버리고 원치 않는 결혼생활을 겨우 지속해가면서 알코올 중독에 빠졌다가 이제는 젊은 청년을 유혹하는, 우울하면서도 매력적인 중년 여성을 훌륭하게 연기해준다. 앤 밴크로프트는 원래도 유명한 연기자였지만 로빈슨 부인의 역할이 워낙 강렬해서인지 <졸업> 이후에도 <Elephant man>, <신의 아그네스>, <위대한 유산> 등에서 훌륭한 연기를 보여줬음에도 젊은 청년을 유혹하는 중년 여인의 이미지를 벗어나기가 힘들었다고 한다.  

관객에게 카타르시스를 주는 너무나 유명한 엔딩신 때문에 이 영화가 해피엔딩처럼 오인될 수도 있다. 그러나 이유도 모르고 신부를 뺏겨버린 신랑도(왜 또 만만한 게 의대생인지 개인적으로는 더 불쌍하게 느껴진다), 불륜 관계였던 동네 청년을 쫓아가버린 딸을 보며 오열하는 로빈슨 부인도, 모든 사정을 알고 이혼을 하기로 했던 로빈슨 씨도, 그리고 자식을 자랑스러워하던 벤자민의 부모 그 누구도 행복하지 않은 결말이다. 


그렇다면 극적으로 결혼식장에서 도망쳐 나온 벤자민과 엘레인에게는 과연 해피엔딩이었을까? 버스에 뛰어오른 주인공들은 성공적으로 도망쳤다는 것에 신나게 웃음 짓다가 얼굴에 점차 알 수 없는 불안감이 서서히 드리워지는 마지막 장면은 교회에서 도망쳐 나오는 부분보다 나에게는 더 인상적이었다. 비록 사랑을 쟁취했으나 여전히 이 젊은이들 앞에는 불확실한 미래가 있을 뿐이다. 영화의 시작에 비행기에서 보여준 불안하고 공허한 표정은 사랑을 쟁취한 후에도 벤자민의 얼굴에서 다시 나타난다.



이런 결말에서 보면 이번에 새로 개봉하면서 만들 포스터보다는 예전의 로빈슨 부인의 다리와 그 너머  어정쩡하게 서 있는 벤자민이 묘한 구도로 자리잡은 포스터가 더 어울린다는 생각이 든다.


이 영화가 1967년에 개봉되었다는 점을 생각하면 당시 젊은이들이 직면하고 있던 현실과는 좀 동떨어져 보이는 느낌도 있다. 전 세계적으로 자유주의의 물결이 시작되면서 68 혁명이 일어나기 직전에 프랑스에서는 장 뤽 고다르가 <중국 여인>이라는 모택동을 찬양하는 영화를 찍기도 했고 (고다르가 현 중국의 상황을 보면 어떻게 반응했을지 궁금하다.), 미국에서는 인종차별에 대한 저항운동과 베트남전에 대한 반전운동 등으로 시끄러웠던 시기이다. 그런데 <졸업>에서는 이런 사회상을 전혀 감지할 수 없고 벤자민이 버클리대학 앞에서 방을 얻을 때 주인에게 학생 운동하는 사람에게는 주지 않겠다고 듣는 게 전부이다. 


오히려 영화는 로빈슨 부인이 옷을 벗을 때 선명한 비키니 자국을 드러내게 하고 집에 있는 수영장에서 가족이 수영을 하거나 파티를 즐기는 장면을 반복적으로 보여줌으로써 캘리포니아로 대변되는 미국의 한편에서는 사회문제보다는 현재의 물질적인 풍요로움을 만끽하고 있다는 것을 강조한다. 그러나 물질문명의 풍요로움을 만끽하는 이곳에서도 젊은이는 미래에 대한 불안으로, 나이 든 사람은 현실에 대한 불만족과 우울감으로 각자의 고민을 안고 살아가고 있다는 점을 영화 <졸업>은 웅변한다. 


물론 Midnight cowboy 같은 영화들도 이 시기에 만들어졌지만 한국에 주로 알려진 영화는 1970년 개봉한 <Love story> 같은 류의 영화이다.  오히려 당시 시대상을 반영한 영화들은 나중에 만들어졌고 1988년에 개봉한 <1969> 같은 영화들이 대표적인데 이 영화에서는 아이언맨의 Robert Downey Jr, 24시의 Kiefer Sutherland, 그리고 Winona Ryder의 풋풋한 젊은 시절을 보는 재미도 있다.

사실 고등학교 때는 <졸업>이라는 영화 자체보다 사이먼과 가펑클의 노래들을 먼저 듣기 시작했었다. "The Sound of Silence”, “Scarborough Fair”, "Mrs. Robinson”, "April Come She Will" 등의 주옥같은 곡을 영화를 위해 작곡하거나 이미 작곡한 곡들을 영화에 맞춰 바꾼 사이먼 앤 가펑클은 Mrs. Robinson으로 그래미상을 수상했는데, 영화 내내 다양한 버전의 Mrs Robinson을 들을 수 있다.  Sound of silence는 영화의 시작과 끝에서 나오는데  할리우드 영화 최초로 가수들이 영화만을 위해 곡을 제공했던 작품으로 이후 영화 제작 패턴에 많은 영향을 줬다고 한다. 


비록 영화지만 그러면 벤자민과 엘레인은 행복하게 잘 살았을까 아니면 많은 미국의 부부들처럼 이혼하고 다른 사랑을 찾아 떠났을까 하는 궁금증이 생긴다. 나뿐만 아니라 많은 사람들이 그랬을 것이고 이 영화이 후속작에 대한 소문들도 많았다. 이런 sequel이 실현되지는 않았지만 long take opening scene이 유명한 Robert Altman감독의 <Player>라는 영화에서 잠깐 그 후속 이야기를 들을 수 있다. <졸업>의 시나리오 작가인 Buck Henry가 카메오로 출연해서 졸업 II에 대한 줄거리를 영화제작자에게 열심히 설명하는 장면이다. 25년 후 벤자민과 엘레인은 여전히 같이 살고 있고 로빈슨 부인은 중풍으로 2층에 누워있다고 하는데… 할리우드다운 재치 있는 장면인데 시나리오 작가 Buck Henry는 <졸업>에서도 호텔 직원으로 출연한다. 

https://youtu.be/biaTRgFKJ3I


영화를 보면 또 자동차에 대한 이야기를 안 하고 넘어갈 수 없다.

대학을 졸업한 벤자민에게 아버지는 빨간색 스포츠카를 선물한다.

Alfa Romeo 1600 Duetto Spider.

이탈리아의 최신형 (출시연도가 1967년이었으니까) 스포츠카로 로빈슨 부인을 처음 집에 태워다 주면서 유혹이 시작되고, 사랑을 찾아 샌프란시스코까지 가서 오클랜드 베이 브릿지를 넘어 버클리에 찾아가기도 하고, 산타바바라에 있는 결혼식장을 찾아서 갈 때쯤이면 기름이 바닥나 서버리는 이 차는 그야말로 허영과 사치, 동시에 젊음을 나타내는 아이콘으로 사용된다. 이와는 달리 미국의 대중차인 포드 자동차가 로빈슨 부인의 나쁜 기억 속에 장치물로 등장해 극적인 대조를 이룬다.


벤자민을 보면서 대치동에서 열심히 학원을 다니며 대학입시를 위해 모든 것을 바치는 학생들과 뒷바라지하는 부모들이 떠 올랐다. 그런 스트레스 외에도 부모의 특권으로 어려움을 건너뛰고 한국 사회의 욕망의 끝에 진입한 다른 젊은이에게 분노했던 이 시대의 젊은이들은 또 어떤 나름의 고민이 있을까?


    

작가의 이전글 에릭 클랩튼-기타의 신(2017)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