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어폰을 귀에서 빼기로 했다.
더 정확히 말하면 집 밖을 나서자마자 귀에 끼었던 이어폰을 이번에는 빼기로 했다. 특별한 계기가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그저 이어폰을 끼고 유튜브를 들으며 걷는 데, 아무런 생각이 없이 남들의 이야기와 음악에 끌려 다닌다는 느낌을 받았기 때문이다. 근래 이어폰을 끼면서 더더욱 생각 없이 지내던 시간이 많았던 것 같다. 알게 모르게 느껴지던 피곤함과 정신 사나운 것들이 어쩌면 내가 아무 생각 없이 들었던 스마트폰 때문이었으리라.
내가 스마트폰을 언제 이렇게 많이 듣게 되었는지 곰곰이 생각해 보면 대학교 2학년 시절부터이다.
당시만 해도 스마트폰은 내게 통화 수단에 불과했고, 남들 다하는 게임이나 심지어 유튜브를 통한 영상도 좀처럼 보지 않았다. 내가 늘 하는 것이라곤 틈틈이 도서관에 가서 책을 읽는 것이 나의 낙이었을 뿐, 휴대폰으로 무언가를 좀처럼 하진 않았다. 그러다가 영어 공부에 대한 흥미를 가지게 되었다.
"24시간, 영어를 보고, 듣고, 읽고 생활화하세요!"
영어를 잘하려면 영어를 몸에 체화해야 한다는 여러 조언을 듣게 되었다. 당시 인도를 다녀온 이후로 영어 회화를 잘하고자 하는 의욕이 불탔던 탓에 영어로 된 유튜브 콘텐츠를 본격적으로 보게 되었다. 돈 들지 않고 볼 수 있었던 유튜브는 내게 비싼 고액 학원비를 내지 않아도 영어를 배울 수 있는 황금의 샘물과 같았다. 그 후 유튜브에서 다양한 토크쇼와 영상을 섭렵하게 되었고 공간시간이거나 과외를 하러 가는 길에서도 영어를 틈틈이 듣고 입으로 내뱉곤 했다. 그래도 이때까지만 해도 중독 수준은 아니었던 것 같다.
그러나 이후 코로나를 겪으며 집 안에서 보는 유튜브 시간이 대폭 늘어났고, 직장 생활을 시작하면서 현실에서 느끼는 고통과 외로움이라는 갈증을 그런 영상 매체에서 찾기 시작했다. 특히 외부 소음을 차단해 주는 노이즈 캔슬링 효과를 가지고 있는 이어폰을 갖게 된 이후에는 대중교통 속에서 이어폰을 끼는 순간 그 공간은 나만의 독립적인 공간과 시간이 주어지는 것만 같았다. 함께 있지만 서로가 저마다의 공간을 가지는 순간이 되었다.
그런 공간이 나빴던 것만은 아니었지만 문득 내 모습이 노예와 같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자율적으로 생각하는 법을 잊은 채 잘못된 건지도 모를 영상과 누군가의 음성을 아무런 필터링 없이 수용하게 되었다.
"어쩌면 지금도 나의 생각과 행동은 상당 부분 이런 영상 속 인물들의 말에 영향을 받고 있는 것은 아닐까?"
이어폰을 끄고 나니 비로소 버스가 멈춰서 도착한 소리, 사람들의 발걸음 소리, 심지어 빨리 가라는 자동차 의 클락션 소리도 들렸다. 어찌 보면 소음소리라고도 할 이 소리가 내게는 어쩐지 경쾌한 소리로 느껴졌다. 참 이상한 일이었다. 이어폰 속 재즈 음악이나 훌륭한 분들의 강연도 어쩐지 버스가 정차할 때 내는 '척하는 소리'보다 못한 것 같았다. 그동안 내 귀는 이런 소리에 너무 절여져 있었나 보다.
나는 신촌으로 가는 버스에 올라탔다. 덜컹거리는 버스 안에서 사람들은 저마다 스마트폰을 보며 보냈다. 양화대교를 건널 무렵 비치는 한강의 아름다운 물줄기도 작은 화면 속 사람들을 보느라 사람들에게는 묻힌 것 같았다. 사실은 그게 지금껏 내 모습이었다.
언제부터인지 대중교통에서의 기다림과 지루함을 잊게 만들어 준 스마트폰과 이어폰 덕분에 그 시간 동안은 생각이란 걸 하지 않게 되었다.
사람과 사물에 대한 관찰보다는 보고 싶은 것, 듣고 싶은 것만 취사 선택하는 습관들은 어쩐지 내게는 옳게 느껴지지 않았다. 현실 세계 속에 스쳐 지나가는 많은 사람들은 저마다 개성이 있었고 삶의 모습이 다들 달랐다. 문신을 하고 있는 젊은 남녀부터 시작해서 거동이 불편한 어르신, 어린 자식의 손을 꼭 붙잡고 있는 엄마들까지. 어쩌면 현실 속에 있던 다양한 사람들의 모습을 잊은 채, 내가 보고 싶은 것만 보고 살았던 것은 아닌가 싶었다.
이제는 대중교통을 탈 때면 가급적 이어폰을 쓰지 않으려고 한다. 사람들의 잡담소리도, 버스의 정차 소리도, 때로는 조금은 성가신 시위 소리들도 한번 들어보기로 했다. 도착지까지 가는 그 지루함도 한번 견뎌보기로 했으며, 그 시간 동안 '사람과 사물을 관찰'하며 '생각'이라는 것을 해보기로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