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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울의 의미

by 하루

왜 사람은 우울해야 할까.

인류가 진화를 거듭했다고 하면서 우울이라는 감정을 굳이 인간이 느껴야 할 이유가 있을까라는 생각이 들었다. 우울이라는 감정이 없다면 우울증을 앓고 어려움을 겪는 사람이 없을 텐데, 모기와 더불어 이 우울이라는 감정의 의미는 참으로 이해할 수 없다.


나 역시도 천성이 그런지 우울이라는 감정을 종종 느끼곤 한다. 함께 있으면 혼자 있고 싶지만, 혼자 있을 때면 누군가가 그리워지곤 한다. 때로는 사람과 관계없이 울적한 기분이 들기도 하는데, 그럴 때면 내 내면이 깊은 물속으로 침전한다는 느낌이 들곤 한다. 그렇다고 우울증이라는 치료 정도는 아닌데, 실제로 우울증 테스트를 할 때 내가 우울증은 아닌 걸 깨달았다. 우울증 증상의 첫 질문이 "요즘 식욕이 없다."였다. 식욕은 너무나 왕성했고 음식에 관한 것이라면 삶의 의욕이 너무 강했다.


아무튼, 이 우울이라는 감정은 어떤 의미가 있는 것일까. 사실 떠올려보면 현대 문학의 작가들 상당수가 우울증에 시달렸을 것이라 생각된다.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 속 주인공은 우울증을 앓고 심지어는 극단적인 선택을 한다. 그것을 쓴 괴테도 젊은 시절 실연의 아픔으로 우울증을 앓았다고 한다. 멀리 갈 필요 없이 채식주의자를 쓴 한강 작가님도 왠지 모를 고민과 우울감을 느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분의 글에서는 왠지 모를 우울감이 느껴진다.


어쩌면 우울이라는 것은 '삶에 대한 고민'을 보다 섬세하게 하는 상태이고 '만족할 수 없는 현실'을 성찰하는 기회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인류 문학 발전의 상당 부분은 우울한 사람이 만든 발자취는 아니었을까 싶기도 하다.


우울한 상태인 사람일수록 실제로 비극이 닥쳤을 때 의연할 수 있다는 생각도 든다. 나는 원래 기질이 우울했었는데, 그렇다고 감정이 없는 사람은 아니지만 때론 꽤 의연한 적이 있었다.


내가 중학교 3학년 시절 교회도 같이 다녔고 나름 친한 친구가 어느 날 교통사고로 하늘나라로 떠나게 되었다. 사실 그 일은 우리 반뿐만 아니라 작은 마을 전체가 슬픔으로 가득 찼었다. 그런데 나는 어쩐지 눈물이 나지 않았고 당시 상황을 덤덤하게 받아들였다. 친구의 사망 소식에 나는 덤덤히 반응했다. 눈물이 나지 않고, 슬픔을 사무치게 느끼지 않던 내 모습과 감정은 어쩌면 내가 사이코패스는 아닐까라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내 나름대로는 그때의 감정에 대해서 훗날 영화 '멜랑꼴리아'라는 것에서 의미를 찾고 해석하게 되었다.


영화 '멜랑꼬리아' 속 주인공 저스틴은 지구에 행성이 다가와 모두가 죽을 수 있다고 항상 걱정하고 우울해했었다. 사람들은 그런 그녀가 너무 과하다고, 걱정하지 말라고 했다. 그리고 영화는 정말 행성이 지구로 다가와 곧 멸망하게 되었다. 그때 모두들 혼비백산하며 떨고 있었던 그때 항상 걱정하고 우울했던 그녀는 오히려 더 담담하게 그 상황을 받아들였다. 저스틴의 모습은 내게 우울이라는 감정이 인류에게 주는 의미도 생각해 볼 수 있는 힌트를 주었다.


우울한 사람일수록 막상 어려운 현실, 가슴 아픈 일에 남들보다 덤덤하게 대응할 수 있진 않을까 싶다. 원래 우울하기 때문에 더 가슴 아픈 현실에 대한 의연한 대처가 가능하다는 생각. 그래서 인류의 진화 과정에서 나타난 DNA는 우울이라는 감정이 필요하다는 건 너무 억지 일려나. 그 외에도 우울이라는 감정은 내면의 성숙과 자기 자신을 교정하는 시간이 되어준다고 한다. 그것도 맞는 소리인 것 같다.


어쨌든 나의 결론은 사람의 감정에는 우울함이 있기에 삶에 대한 고민과 성찰을 통해 바른 길로 갈 수 있기도 하고 때로는 아픔에 의연하게 대처할 수 있는 기반이 되어 주는 것이 아닌가 싶다.


그렇기에 때로 우울한 건 받아들여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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