꿈을 가진다는 것은

by 하루

어릴 적 부터 부모님을 따라 밭으로, 산으로 다녔다. 시골에서 보고, 듣고, 자란 터라 밭에서 부모님을 도와드리는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했고, 지금도 그 생각에는 변함이 없다. 학교를 마치고 집에 오면 염소 우리를 함께 짓거나, 주말에는 나무를 옮기러 아버지를 따라 다녔다. 초등학교 5학년 때즘에는 꽤 무거운 나무들도 옮길 수 있었다. 나무를 가지러 10년도 더 된 차를 타고서, 수풀 속에 있는 한 농장으로 가곤 했다. 그때마다 아저씨나 아주머니들이 더운 데 고생한다며 매실주를 줬는데, 아직도 그때 만큼 맛있는 매실주를 마셔보질 못했다.


어머니는 얼굴이 늘 햇볓에 그을려 있었다. 지금은 어머니도 살이 조금씩 찌고 계시지만, 지금 생각해보면 당시 어머니는 몸에 너무 마르셨었고, 늘 항상 초췌해보였다. 항상 밭에 나가서 일을 하셨고, 할아버지와 할머니의 눈치를 보면서 생활하셨던 것 같다. 어린 나에게는 그런 것이 보이지 않았다. 가끔식 서랍 속에 숨어있는 액자 속 고운 아가씨가 어머니 본인이라고 말씀하실 때마다, 정말로 믿을 수 없으리 만큼 액자 속 사람은 희고 살이 통통했다. 시골 일이 TV에서 그려지는 것 만큼 만만치 않았고, 어머니의 시집 살이는 그 한 수 위였다.


철은 없었지만, 어머니를 볼 때마다 어렴 풋이 항상 내가 좀 더 일을 도와드려야 된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버지를 따라 어머니 대신 일을 도와드리면 어머니 할 일이 줄어들겠지라는 생각에 버거운 일도 게으치 않고 하려고 한 것 같다. 물론 그 때마다 어머니는 다른 일을 홀로 하셨었다. 물론 아버지도 항상 일을 하고 계셨다. 아버지의 어깨에는 두 부모님과 아내, 아무 것도 모르는 자식 3명이 부둥켜 앉아 있었기에, 아버지가 느끼는 무게도 이만저만한 것이 아닐 것이었다.


아버지는 술을 마시거나, 폭력을 쓰시는 분은 전혀 아니었지만 줄 곧 화를 잘 내셨다. 그런 아버지가 당시에는 매우 무섭기도 했지만 지금 생각해보면 애처로움이 더욱 큰 것이 사실이다. 아버지는 어릴 적 원하는 만큼 공부를 할 수 없었는데, 못 먹고 살던 당시 누군가는 일을 도와야 했고, 학교를 가는 것은 선택 받은 할아버지의 자녀만이 갈 수 있었다. 아버지는 선택 받지 못했다. 아버지는 이것이 평생에 한이셔서, 나중에 할아버지와 이것 때문에 다투기도 했다. 할머니는 그때마다 미안하다며 홀로 우셨다. 나는 그 상황이 무섭기만 했는데, 그럴 때마다 컴퓨터 게임을 게걸스럽게 하곤 했다.


그래도 우리 가족은 주일마다 교회를 갔다. 신기하게도 교회 갈 때마다 아무 일이 없었던 것처럼 갔다 오곤 했다. 나 역시 교회를 갔는데, 그렇다고 내가 신앙심이 좋았던 것은 아니었다. 일종의 습관이기도 했고, 집에 있고 싶지도 않았기 때문이다. 그래도 아동 예배가 일찍 끝나서 집에 돌아오면 혼자 있을 수 있어 좋았다. 그때만큼은 마음이 편했다. 나이가 조금 씩 들어가면서, 그 전에는 내가 보지 못했던 것들이 슬슬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 왜 나는 이 옷 만 입고 있지?"

떠올려보면 나는 쇼핑이라는 것을 거의 해본 적이 없었고, 그마저도 대학생이 되어서야 본격적으로 쇼핑을 해보았다. 조금 다른 얘기지만 그래서 쇼핑하러 갈 때면 어쩔 줄 몰라 많이 애먹었다. 어릴 적부터 쇼핑을 자주한 사람들은 이해를 못할 수도 있다. 친구들과는 조금 다른 옷과 신발들이 슬슬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고, 빚이며 가난이 무언인지 이제는 조금씩 체험하기 시작했다.


특히나, 아버지는 교회를 갈 때도 늘 헌 운동화만 신고 다니셨는데, 그때는 그게 편한 가보다라고 생각을 했다. 그러나 항상 같은 옷, 같은 헌 운동화를 신고 다니시는 모습에 어느 순간 마음이 저며오게 되었다. 그때부터 언제가는 좋은 신발을 사드리고 싶은 꿈이 생기게 되었다.


한편, 어머니는 집안 일과 밭 일 외에도 학교 문을 여닫곤 하셨다. 어떻게 그 많은 일을 조그마한 여성이 다 감당할 수 있었을까. 친구들은 어머니를 '문 닫는 아줌마'라고 불렀는데, 얼핏 들으면 기분이 나쁠 수도 있었지만 나는 아무렇진 않았다. 부끄럽게도 당시 시골 초등 학교에서는 '힘 좀 쓰는 애'로 굴림하고 있었다. 그렇다고 폭력이나 이런 게 있었던 것 전혀 아니다. 전교생이 20명이 었던 우린 영화 속 아이들 만큼 착하고 순진했다. 학교에서는 복도에 각 학생들이 동시나 글들을 전시하곤 했는데, 전교생이 20명이다 보니 내 글도 액자로 벽에 걸려 있었다.


하루는 학교를 마치고 어머니 묻을 닫고 함께 집에 가고자 했다. 그런데 어머니가 보이질 않았다. 복도 이곳 저곳을 찾은 끝에 어머니께서 복도의 한 액자를 보시면서 싱긋이 웃으시는 것을 보았다.

" 엄마! 한참 찾았어요."

어머니는 조그만한 나를 물끄러미 보시고는 함껏 끌어 안아 주셨다.

" 우리 아들 글을 정말 잘 쓰는구나! 어떻게 이렇게 글을 쓰는지 너무 자랑스럽다."

나는 사실 글을 잘 못 썼기에 어찌할 줄 몰랐다. 그러나 그 경험은 그런 어린 나이에도 어머니에게 힘이 되어줄 수 있는 글을 쓰고 싶다는 다짐을 하게 되었다. 고된 일과를 마치고도 읽을 수 있는 어렵지 않고, 재밌고, 힘이 되는 글. 그런 글을 쓰고 싶다는 꿈이 생기게 되었다.


그러한 내 유년 시절의 작은 꿈들은 굴곡이 많았던 내 중고등학교 시절을 잘 보내게 해준 마음 속 푯대가 되어주었다. 그리고 사실은 아직도 내 마음 속의 푯대로 남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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