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월 17일, 일요일
ep. 1
가게 문을 여는데 문 앞에 우산이 하나 놓여 있다.
어제 저녁 갑자기 비가 조금씩 내려 가게에 있던 우산을 하나 내어 드렸는데, 그걸 돌려주고 가셨다.
비가 오던 어느 날 다른 손님이 가게에 두고 가신 비닐우산이었다.
비닐우산이라 편하게 내어드렸고, 돌려받을 생각하지 않고 드린 거였는데 문 앞에 놓여 있는 우산을 보니 괜스레 마음이 따뜻해진다.
오늘까지 여행을 마치고 잘 올라가셨을까 손님의 안부가 궁금하다.
ep. 2
갑자기 추워진 날씨에 오늘은 돌아다니는 사람이 없겠다 생각하며 혼자 보내고 있는데 두 분이 들어오신다. 들어와서 두 잔의 커피를 시키고 책을 둘러보신다.
아무도 재촉하는 사람 없는데 혼자 마음이 급해져 두 잔의 커피를 한꺼번에 내리기 시작했다. 지난번에 두 잔까지 내렸을 때 맛이 괜찮아서 같은 레시피로 내렸는데 너무 강하게 내려졌나 보다. 뜨거운 물을 요청하시고 결국 커피도 남기고 가셨다.
바쁘지도 않은데.. 이렇게 바쁘지 않을 때 한 분 한 분 정성껏 대해야 하는데 한잔씩 내릴걸 왜 두 잔을 한 번에 내렸니.. 손님 중 어느 분도 빠르게 요청하지 않았는데..
나를 자책하며 돌아가시는 두 분을 따라나가 다급히 외쳤다.
“다음에 다시 한번 들려주시면 그때는 커피 맛있게 내려서 한잔 대접할게요!”
실수에서 배워야 하는 법! 다음부터는 꼭 한 잔씩 내려서 드려야지!
ep. 3
이어서 들어온 다른 두 분은 원두를 다른 종류로 두 잔을 시키셔서 한 잔씩 내려 드렸다.
다행히 두 분께는 커피 맛이 좋았나 보다. 방명록에 커피 맛집이라고 남겨주신걸 보니.
필사와 방명록을 쓰는 테이블에 머무시며 필사를 하시다 컬러링 북 색칠을 하시다 책을 읽으시다 그렇게 한참을 그 테이블에 앉아 있다 가셨다. 그 모습에 미소가 지어진다.
ep. 4
오전에 첫 손님으로 오셨다 엽서 에세이를 사가신 분이 한참 있다가 다시 책방을 오셨다. 계속 마음에 맴도는 책을 사가려고 다시 오셨다 한다.
다른 사람에게도 내가 느낀 느낌을 느끼게 해주고 싶어서 책 소개 메모를 적어 놓은 책이다. 그 메모까지 가져가셔서 내 마음이 가 닿은 거 같아 마음이 활짝 웃어진다.
방명록을 읽다 보면 이 공간에 의미를 만들어주는 건 찾아오는 손님들인 거 같다.
시작은 내가 좋아서 내가 하고 싶어서 내 취향대로 만든 책방이지만 이곳에 오는 각기 다른 사람들이 각자 느끼고 담아가는 것들에 그 흔적을 책방에 남기고 떠난다. 남겨진 그 흔적들이 책방의 의미를 만들어 간다는 생각을 했다.
책방지기인 나는 이 공간에서 어떤 의미를 찾을까.
자아실현? 그건 이루었고.
이 공간을 찾아주는 사람들이 남기고 간 마음을 잘 지켜주고 싶다는 책임감이 커진다.
그 사람들이 남기고 간 의미를 잘 지키고 다음에도 또 찾을 수 있도록 오래 이 공간을 지켜가는 게 나의 의미가 아닐까.
그렇게 드문드문 오던 발걸음이 2시부터 끊겼다.
나도 춥고 어두워지면 따뜻한 집으로 빨리 돌아가고 싶은 마음이니 이해한다.
나도 가고 싶다. 따뜻한 집으로.
겨울이 되면 귀가본능이 더 강해진다.
겨울은 내가 가장 싫어하는 계절이다.
추위를 유독 심하게 타서 겨울을 못 견뎌한다.
황량해진 풍경도 너무 쓸쓸하다. 모든 생명체가 다 죽어 있는 느낌이다.
“겨울을 가장 싫어해요”라고 얘기하던 나인데,
최근 한정원 작가님의 ‘내가 네 번째로 사랑하는 계절’에 나오는 시를 소개받았다.
하지만 여름은 내가 네 번째로 사랑하는 계절이다.
세 번을 거쳐 온 마음은 미약하다.
그래도 싫다고 말하고 싶지는 않은 마음.
한껏 사랑할 수 없다면 조금 사랑하면 되지.
나처럼 가장 싫어한다 표현하지 않고,
네 번째로 사랑하는 계절이라 표현하다니! 아마 세상을 나보다 다정한 시선으로 바라보시는 거 같다.
앞으로는 나도 겨울이라는 계절을 말할 때 이렇게 표현해야겠다.
‘겨울은 내가 네 번째로 사랑하는 계절이에요, 세 번을 거쳐오느라 마음이 미약해져서 한껏 사랑할 수 없지만 조금 사랑해요.’라고
읽고 싶은 책이 목록에 하나 더 쌓였다.
남은 시간을 무얼 하며 보낼까…
생각하다 어제 보다 멈춘 영화 생각이 나서 마저 시청했다.
오늘은 한 편을 다 봤다.
퍼펙트 데이즈는 매일 똑같이 반복되는 일상을 다른 시각에서 볼 수 있게 만든 영화이다.
매일 똑같이 반복되는 일상이지만 그 하루 속에 내가 본 풍경도 조금씩 다르고, 만났던 사람도 조금씩 다르다. 그런 일상의 소중함을 중요히 생각하는 나라서 잔잔하게 미소 지으며 봤다.
영화까지 다 보고 이제 책을 좀 읽을까 하는데 손님이 한 분 들어오시고 이어서 근처 소품샵 사장님이 들어오신다.
예상치 못한 반가운 얼굴에 한참을 수다를 떨다 보니 어느새 8시가 훌쩍 됐다.
손님이 없을 때는 시간이 참으로 더디게 흘러가는데 사장님과 수다 떨다 보니 시간이 금방 갔다.
오늘 하루가 이렇게 끝났다.
이곳을 다녀간 몇 분의 손님과 이곳에서 보낸 나의 시간이 쌓여 하루가 지나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