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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주현석 Nov 06. 2023

PACHINKO

역사가 우리를 망쳐 놨지만 그래도 상관없었다.


역사가 우리를 망쳐 놨지만 그래도 상관없다.


소설 <파친코>의 첫 문장이다.

일제강점기와 전쟁을 겪으며 개인은 파괴되고 몰락한다.

하지만 더러는 살아남아 생을 이어가고,

그들은 청년이 되고 중년이 되며, 노인이 된다.


1990년대 초반, 식민지화된 조국에서 약탈, 멸치, 살인이 자행된다.

힘이 없기 때문에. 개인을 초월한 국가 앞에서 한낱 개인은 무력하다.


동주(2016)



1950년, 전쟁이 발발한다.

독립이 피부로 와닿나 싶더니 곳곳에서 화약이 터진다.

살기 위해선 도망쳐야 한다. 삶의 목적은 생존이다.

개인은 여전히 무력하다. 발가벗겨진 육체는 쇠붙이에 으스러진다.


한국에서의 학살(1951) - 피카소


전쟁이 끝났다. 불완전한 평화 속, 그러나 순간의 잡음은 여전하다.

군부독재와 민주주의의 열망이 충돌한다.

역시 많은 피가 쏟아지고, 참지 못한 사람들은 거리로 나선다.

생존이 목적이던 삶은, 이제 민주주의를 향해 행진한다.

살고 싶은 게 아니다. 사람답게 살고 싶은 것이다.


1987(2017)


군부독재가 무너진다. 민주주의가 점차 안정적으로 정착한다.

무소불위의 권력이 한풀 꺾이자, 그 자리에 자본이 틈입한다.

대공황, IMF. 직장에서 하루아침에 잘리고 거리로 나앉는 사람들이 증가한다.

편리한 삶을 위해 개발된 화폐는 사람 위에 군림한다.

목숨에도 값이 붙는다. 인간의 가치는 수량화된다.


나, 다니엘 블레이크(2016)


그리고 21세기.

사람들은 말한다. 세상 참 편해졌다고. 요즘 사람들은 고마운 줄 모른다고.

틀린 말은 아닐지도 모른다. 우리는 식민화와 대공황, 전쟁과 독재가 없는 시대에 살고 있다.

사람답게 살고 있다고 자부한다. 그런데, 문득 고개를 들이미는 의문 하나.

사람답게 사는 건 어떻게 사는 건가.


10대 후반에 인생의 형질이 대충 판가름 난다. 사람을 부를 때, 이름 앞에 대학과 직장이 선행한다.

취업은 아득하다. 하고 싶은 게 뭔지 미처 생각해 본 적이 없다. 생각이 났을 때에는, 너무 멀리 왔다고 한다. 너무 늦었다고 한다.

세상은 불안하다. 언론은 안보와 경제에 대해 떠들어댄다.

핵, 무력시위 따위의 낱말이 매일 오르내린다. 경제는 올해도 불황이란다. 전염병이 창궐하고 집단은 해체된다.

의견을 피력하면 무수한 반박이 줄을 잇는다. 잣대 몇 개로 순식간에 편협한 인간으로 낙인찍힌다.

사방에 혐오가 널린다. 남자여서, 여자여서, 아이여서, 어른이어서, 노인이어서, 장애가 있어서, 소수여서, 다수여서.


답답하다. 분노가 치솟는다. 그런데 그 이유를 알 수 없다. 분노의 대상이 부재한다.

세상에 분노한다. 사람들은 공감하지 못한다. 이렇게 살기 좋아졌는데. 배부른 소리로 치부한다.

문제는 너에게 있다고 한다. 너무 예민하고 민감해서이다. 그게 문제다.

쌓인 분노는 응축되고, 어느 순간 무작위로 터진다.

분노가 내부를 향하면 개인은 스스로 파멸한다. 사람들은 안타까워하나, 그러한 소식들은 매체를 통해 하루에도 수십 번 전파된다. 사람들은 서서히 둔감해진다.

분노가 외부를 향하면 사회적 이슈가 된다. 그제서야 사람들은 돌아본다. 그리고 그를 격리한다.

참지 못한 개인의 탓이다. 정상적인 사회에 모난 돌이 된 그는 벌 받아야 마땅하다.

모난 돌은 외부의 자극에 의해 깎여나가 생성된다. 그러나, 표면이 깎이는 과정은 잘 보이지 않는다.

모난 돌은 위험하다. 그저 치워야 하는 것이다.


2019년, <기생충>이 개봉한다.

천만 관객을 달성한다. 사람들은 다양한 반응을 보인다.

어쩌다 이 사단이 났나. 혹자는 사장인 동익(이선균)네 가족을 그 원인으로 지목한다.

상위 계층의 무지로 인해 촉발된 비극.

혹자는 문광(이정은) 탓이라 한다. 하위 계층의 분노가 엉뚱한 방향으로 향한 것이다.

기택(송강호)을 가리키는 사람들도 있다. 하위 계층을 멸시하며, 상위 계층에 기생충처럼 붙어먹는 존재. 비극의 시발점이다.

영화가 끝나면 찝찝하다. 사람이 죽었고 참극은 벌어졌다. 누구의 책임인가. 구체적인 원인을 지목하자니, 무엇 하나 명쾌하지 않다.

마음속 깊은 곳에서 분노에 대한 공감이 자리한다. 하지만, 그렇다고 이 비극을 정당화할 수는 없다.


혼란스럽다.


기생충(2019)


한국의 자살률은 OECD 1위이다. 10만 명당 26명이 자살한다. 매년 13,000명 꼴이다.

나라는 살기 좋아졌는데, 자살률은 꾸준히 증가한다.

살기 좋아지니까 사람들의 마음이 약해진 것이다.

살기 좋아져서.

혐오가 판을 치고, 정보가 쏟아지며 참 거짓이 마구잡이로 뒤섞인다. 폭력은 일상으로 침투하였고, 범죄는 고도화되었다.

부조리가 만연하다. 무엇이 부조리하냐고 물으면 깔끔하게 대답할 수 없다.

언어는 장난감이 되었다. 아 다르고 어 다른데 또 둘은 같을 수도 있다.

사람들은 언어를 포기한다. 앙상한 나무 앞, 고고와 디디는 자기 말만 한다. 고도는 오지 않는다.

사람들은 체념한다. 단지 이 알 수 없는 세상에 몸을 맡길 뿐이다. 아니면 탈출하거나.


고도를 기다리며


무엇이 우리를 망쳐놨는지 알았다. 그것만 해결되면 될 줄 알았다.

모든 게 해결되었다. 삶의 질은 말할 수 없이 향상되었다. 평화가 도래했다.

그런데, 답답하다.


무엇이 우리를 망쳐놓는지 모른다. 그리고 그건, 어쩌면 상관이 있다.




노아는 조선인이라는 꼬리표를 극복하고 와세다 대학에 입학한다.

힘없는 민족적 아픔을 딛고, 그는 성공을 향한다.

어느 날, 노아는 진실을 알게 된다.

선자는 처녀 시절 야쿠자인 한수와의 관계를 통해 아이를 가진다. 한수는 유부남이다.

선자는 한수가 유부남인 줄 몰랐다. 남자가 어떤 건지, 사랑이 어떤 건지 아무것도 몰랐다.

사실을 알고, 선자는 절망한다. 한수는 떠나고, 미혼모가 된 선자를 목사 이삭은 아내로 맞이한다.

노아는 자신의 피의 근원을 깨닫는다. 더러운 피. 노아는 떠난다.


엄마가 제 인생을 앗아갔어요. 전 더 이상 제가 아니에요.


노아는 훗날 어머니와 재회한다. 집에 돌아가마 약속한 후, 노아는 권총으로 자살한다.

노아는 평생 이해하지 못한다. 선자와 한수는 부도덕한 사람들이다. 그들은 자신의 인생을 망쳤다.


선자의 임신은 무지로부터 비롯되었다. 산골에서 태어나, 가족 외에는 누구도 알지 못했다. 그저 평범한 시골 소녀일 뿐이었다.

그녀가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그녀는 임신을 했고, 후에 진실을 알았다. 그녀 역시 역사의 구렁텅이 속 인생을 망쳤다.

그러나 그녀는 살아간다. 자식을 지켜야 했고, 가족을 보호해야 했다.


인간은 불완전하다. 끝없는 실수와 상처를 주고받는다. 그들이 모인 세상 역시 마찬가지다.

사람들은 서로를 이해하려 한다. 세상을 합리적으로 바라보고자 한다.

하지만, 결국 이해할 수 없다. 모든 건 불완전하기에.

이를 받아들이지 못하는 이들은, 결국 부조리한 세상에서 등을 돌리고 파멸한다.


버닝(2018)


꿋꿋이 살아남는 사람들도 있다.

어느 순간, 그들은 이해하기를 멈춘다.

결국 온전한 이해란 불가능한 것이다. 선자는 어쩔 수 없었고, 그건 다른 인물들도 마찬가지였다.

이해하지 않는다. 다만, 받아들인다. 그럴 수도 있다고. 어쨌든, 살아야 한다고.


어느 가족(2018)


선자는 아들인 노아와 모자수를 열심히 키워 낸다.

일제강점기, 전쟁, 재일교포에 대한 편견과 차별, 억압 속

그녀는 아득바득 가족들을 먹여 살린다.

매일 햇빛 아래 일한 탓에 얼굴엔 주름이 가득하고,

바르르 떠는 손은 죽은 남편 이삭의 묘비를 가만히 어루만진다.

폐허가 된 세상은 다시 재건되었고,

그 모든 기억, 추억, 고통, 상흔을 안은 채 하루는 여전히 굴러간다.


파친코(2022)


역사가 우리를 망쳐놨다.

이제는 무엇이 우리를 망쳐놓는지 모른다.

그러나, 망쳐놓은 삶을 우리는 복구한다. 이해를 멈추고 서로를 받아들이면서, 의지하고 도와가면서.


그리고 그건, 아주 큰 상관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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