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뷰 및 스포일러 포함
Prometheus stole fire from the gods and gave it to man.
For this he was chained to a rock and tortured for eternity.
원자 폭탄의 원리는 중성자가 우라늄 및 플루토늄과 충돌하여 생성된 질량의 에너지화와 이의 연쇄 반응이다. 연쇄적으로 생성된 에너지는 주변에 대해 막대한 파괴력을 지니게 된다. 충돌의 잔해, 잔해의 충돌. 마치 전염병처럼 퍼지는 이러한 충돌은 어느새 걷잡을 수 없는 결과를 낳게 된다.
크리스토퍼 놀란의 영화 <오펜하이머>(2023)는 이러한 원자 폭탄 개발에 앞장섰던 천재 과학자 ‘오펜하이머’에 대해 다룬다. 그의 삶을 따라가는 영화는, 그와 불가분 관계에 있는 원자 폭탄에 주목한다. 연쇄적 충돌과 그로 인한 거대한 폭발. 파괴. 이러한 원자 폭탄의 폭발 원리는, 영화 속에서 총 세 번 나타난다.
1. 트리니티 실험
양자역학에 대한 연구를 이어가던 과학자들은, 우라늄에 중성자를 충돌시킬 경우 우라늄이 쪼개지며 질량이 생성된다는 사실을 발견한다. 아인슈타인의 이론에 따라, 질량은 에너지화되어 총량이 보존된다. 이러한 에너지가 연쇄적 반응에 의해 쌓이고 쌓인다면 엄청난 파괴력을 지닐 것이라는 점을 깨달은 과학자들은, 비로소 인식하기 시작한다. 지구를 파괴할 수 있는 막대한 살상력을 지닌 어떠한 존재를.
나치가 정권을 잡고 히틀러가 제2차 세계대전을 일으킨다. 동료이자 사제 관계였던 과학자들은 출신 성분에 따라 서로 동료, 혹은 적이 되어 흩어진다. 하이젠베르크는 독일로, 닐스 보어는 돌고 돌아 미국으로 가게 된다. 그들은 깨닫는다. 이제 폭탄이 세상에 모습을 드러내는 것은 시간문제라는 것을. 단지 누가, 어떤 국가가 먼저 그것을 만드느냐의 문제라는 것을.
오펜하이머는 미국의 지원 아래 맨허튼 프로젝트에 착수하여 실험을 이어간다. 숱한 실험을 이어가는 동안 히틀러는 자살했으며 나치는 붕괴했다. 대량 살상용 무기의 필요성에 대한 의문이 스멀스멀 피어오른다. 나치 붕괴를 위해 만들었던 무기인데, 목표인 나치는 사라져버렸다. 와중에 일본과의 전쟁이 한창 진행 중이다. 항복의 기미가 보이지 않는 일본. 폭탄의 대상이 바뀐다. 실험은 계속되며 드디어 완성된 폭탄은 폭발 실험으로 이어진다.
실패할 확률은 0에 가깝네.
0에 가까운, 그러나 그 일말의 가능성이라도 실현되는 순간 지구 전체의 파멸을 불러일으킬 폭발이 드디어 실행된다.
피어나는 불꽃. 장렬한 산화. 이는 바람. 간격을 둔 채 다가오는 굉음.
실험은 성공한다. 드디어 세상에 원자 폭탄이 모습을 드러낸다.
트루먼 대통령은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원폭 투하 명령을 내린다.
폭탄은 두 도시에 떨어졌고, 도합 22만의 사상자를 발생시켰다.
일본은 다음 날 항복을 선언했으며, 드디어 제2차 세계대전은 막을 내렸다.
2. I believe we did.(우리가 그걸 현실로 만든 것 같아요.)
원폭 성공 후, 소련이 곧이어 원자 폭탄 개발에 성공한다.
당시 프로젝트 참여 인원 중 첩자가 있을 가능성이 드러나자, 당국은 조사를 시작한다.
더불어, 오펜하이머에게 앙심을 품은 스트로스는 과거 오펜하이머의 공산주의 옹호 이력을 이용하여 그를 철저히 괴롭히기로 결심한다.
영화 말미에 오펜하이머와 아인슈타인이 이야기하는 장면이 있다.
멀리서 그들을 향해 스트로스가 걸어온다.
스트로스라는 하나의 중성자가 두 과학자를 향해 다가온다.
충돌. 분노에서 기인한 혐오가 갈등의 씨앗을 내린다.
생성된 질량은 에너지로 변한다. 갈등의 피로와 감정들이 곳곳에 부유한다.
상처가 전염된다. 부정적 에너지가 우후죽순으로 퍼진다. 주변 사람들에게 고통이 전염되고 비극이 점점 거대해진다.
분노가 팽배해진다. 부조리가 만연하고 사회 내외로 냉전이 지속된다. 첨예한 갈등 속 불행은 이어진다.
오펜하이머는 원자력 분야에서 숙청되고 명예를 잃는다. 스트로스는 청문회를 통해 자신의 부조리한 행위가 공개되며 자멸한다.
모두가 파괴된다. 감정에서 비롯된 충돌은 모두가 파멸하는 결과를 불러일으켰다.
불완전한 인간들이 서로에게 상처를 주고받으며 끊임없이 충돌한다. 결국은 모두 상처 입고 파괴된다.
그들의 삶은 언뜻 원자 폭탄의 원리를 닮았다. 충돌과 에너지, 연쇄 반응.
원자 폭탄이 세상을 파멸시킬 확률은 거의 0에 가깝다.
스트로스와 오펜하이머. 그리고 그 시대를 살았던, 불가피한 충돌 속에 휘말렸던 이들.
그들은 극히 낮은 그 확률 속에서 모두 파괴되었다. 그들은 그걸 현실로 만들었다.
3. 오펜하이머
그는 원폭이 일본을 향하는 것을 보며 처음으로 윤리적 갈등을 느낀다. 그의 발명품은 20만이 넘는 사상자를 발생시켰다. 환영 속에서 피해자는 가루가 된 채 널브러져 있었으며, 피를 토하고 죽어가는 사람들이 즐비하다. 그의 손에서 비릿한 피 냄새가 지워지지 않는다. 그는 사람들을 파괴했다. 살상을 자행했다.
원폭. 공산주의. 사랑. 불륜. 살상. 윤리. 평화. 파괴. 희열. 분노. 수소 폭탄. 나치. 일본. 피. 희생. 정당성.
그의 내면에 존재하는 무수한 가치들은 서로를 향해 무질서하게 충돌한다. 충돌이 일으킨 에너지는 연쇄적으로 반응하며 그의 내부에서 거대한 폭발을 이루어낸다. 그는 장렬히 산화한다. 현기증을 느끼며 아무런 말도 할 수 없다. 그의 세상이 끝날 때에도. 그의 세상이 복권될 때에도.
죄책감이라는 중성자는 그 자신을 향해 충돌한다. 그는 그 자체로 원자 폭탄이 된다. 끝없는 내적 갈등의 연쇄 작용. 그는 결국 폭발한다. 그의 부인은 그를 순교자라 칭한다. 순교자는 스스로를 태우며 파멸하는 사람이다. 그는 그 자신을 태우며 파멸해간다.
그는 결국 파괴되었는가.
세월이 지난 후, 정권이 바뀌고 오펜하이머는 명예를 되찾는다. 그의 국가를 위한 행적이 인정받은 것이다. 에드워드 텔러와도 화해하며, 페르미 상을 수상한다.
그의 표정은 밝지 않다. 그는 여전히 순교자이다.
그의 폭발은 진행 중이다. 그가 지닌 죄책감은 끝내 사라지지 않기에. 그의 내부에서 일어나는 충돌은 끝없이 반응을 일으키는 중이다.
그는 여전히 폭발하고 있는 원자 폭탄이다. 그는 폭탄을 창조하며 그 자신 역시 폭탄이 되었다. 결코 멈추지 않는. 영원히 폭발하며 고통 속에 스스로를 가두는.
영화는 물에서 시작한다. 빗물이 고인 바닥을 보여주며 막을 여는 영화는, 거대한 불꽃이 일렁이는 폭발 장면을 넘어 오펜하이머의 얼굴을 비추며 막을 내린다.
물은 생명의 발원지이다. 태고의 생명은 물에서 출현하였다고 한다. 물로 시작되는 영화는 삶의 태동을 선포한다. 이후, 영화는 불의 이미지를 계속해서 제시한다. 불은 파괴적 속성을 지닌다. 프로메테우스가 가져온 불은 거대한 발전과 더불어 인류의 비극적 역사를 알리는 서막이다. 출현을 시작으로 파괴를 거쳐 상처 입은 채 살아남은 인간의 얼굴을 조명하며 영화는 끝을 알린다. 마지막에 드러난 오펜하이머의, 인간의 얼굴은 이 영화가 무엇을 말하는가에 대해 알려준다.
이 영화는 인간에 대해 말한다. 알 수 없는 세상의 어지러운 질곡과 그 속에서 이리저리 휘날리는 인간. 그 불완전하고 어리석으며 상처를 주고받고 그럼에도 실존하는 인간. 그 알 수 없는 삶에 대해 말하는 예술. 영화.
영화는 불완전한 인간의 삶을 논하는 예술이다.
나는 이제 죽음이요.
세상의 파괴자가 되었다.
실험에 성공하자, 오펜하이머는 다음 문장을 뱉는다.
그는 죽음이 되었다. 파괴자가 되었다.
하지만 세상은 여전히 존속한다. 그는 고통받았지만 살아남았다.
그는 인간이다.
때론 선하며 때론 악하고, 불완전하며 나약하고, 이기적이며 다층적인
그는 삶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