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은 이야기다.
<서사의 위기>, 한병철
한병철 교수는 <서사의 위기>에서, 현대 사회에 도래한 서사의 종말에 대한 이유로 정보의 과잉을 지적한다. sns, 언론 등을 통해 무차별적으로 퍼지는 정보는 사건의 단편적인 양태만을 제공한다는 점에서 탈 맥락적이다. 쏟아지는 정보는 구성원들에게 강력한 자극제로 작용하며, 이해할 만한 깊은 층위의 서사가 부재한 정보는 단지 일차원적 판단과 비판의 먹잇감이 될 뿐이다.
기술의 발전과 함께 미래사회의 강력한 발판이 되는 정보화의 기류는, 과연 세계를 미래지향적 흐름으로 이끌고 있는가. 불행히도, 정보의 급류는 구성원들로 하여금 과거의 지점으로 되려 퇴행시킨다. 서사를 거세한 정보들은 무형의 인터넷 영역에서 영원히 기록되어 남게 된다. 그리고 이는, 단순한 글귀와 함께 사람들로 하여금 타인을, 사건을 손쉽게 판단하게끔 하는 매개체로 작용한다. 사람들은 광활한 자극에 대해 더 이상의 노력을 기울이고 싶어 하지 않는다. 요약된 몇 줄의 정보, 사진과 기록들은 사람들로 하여금 과거의 지점들에 대해 간단하게 파악할 수 있게 하며, 도덕적 판단을 쉽게 내릴 수 있게끔 도와준다. 더 이상 판단은 어려운 것이 아니다. 복합적 층위의 사회 생태계는 몇 가지의 기준으로 쉽게 가려낼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정보의 확장성은 되려 사람들의 시선을 압축시킨다. 사람들은 과거의 조각들을 모아 현재를 재단하고 미래를 결정짓는다. 시선의 방향성은 과거를 향한다.
정보가 구성원들의 시선을 과거로 위치시킨다면, 서사는 이러한 시선을 미래로 확장시킨다. 일례로, 최근 유명인들의 마약 관련 이슈가 뜨겁다. 누군가 마약을 했다는 단순한 정보의 발견은, 해당 인물의 도덕성을 기준 짓는 주요한 논거로 작용한다. 인물의 과거 행적들이 조명되며, 인물의 미래 또한 손쉽게 예상되고 재단된다.
그러나, 비슷한 사건이 맥락을 지닌 서사로 제공되면 시선의 방향성이 달라지게 된다. 가령, 영화 <보헤미안 랩소디>는 퀸의 보컬인 프레디 머큐리의 일생을 훑는다. 머큐리는 예술가가 되어가는 과정 속에서 많은 부침을 겪는다. 성적 지향성에 대한 혼란을 겪으며, 심각한 마약 중독에 빠지며 온갖 금기를 넘나들기도 한다. 이러한 개인의 불안과 혼란은 가수가 겪는 내적, 외적 혼돈과 부조리와 무관하지 않다. 끝내 예술적 성취를 이룬 이 가수의 서사를 보며 사람들은 이 인물을 다층적으로 바라보게 된다. 그가 달성한 위대한 업적과 더불어, 그가 겪은 혼란과 저지른 죄악들을 흡수한다. 이때, 대중들은 그에 대한 판단을 유보하게 된다. 그의 생을 그저 관조하며, 그가 지난한 과정을 통해 어디로 향하는가를 확인하며 발을 맞춘다. 서사는 타자에 대한 판단이 아닌, 타자의 자취를 따라 걷는 동행을 유도하게 된다.
영화가 끝나고 개인의 서사를 흡수한 대중들은 자신이 살아가는 세상과 그 속의 자신을, 영화 속 인물의 상황과 견주어 병렬적으로 사고하게 된다. 이 과정에서, 대중들은 흡수한 서사가 일깨운 관점을 통해 자신이 사는 세계를 다시 바라보게 된다. 그간 보이지 않았던 부조리와 불안, 혼란과 희망들. 그 틈에서 개인은 자신의 삶의 방향성을 재구성한다. 한 개인이 겪은 서사를 통해 자신의 미래를 다시 직조한다. 서사는 개인의 시선을 미래로 돌려, 자신의 삶을 새로이 구성해나가도록 유도하는 것이다.
최근 개봉한 미야자키 하야오의 영화 제목은 <그대들은 어떻게 살 것인가>이다. 엄마의 죽음으로 인한 트라우마를 안고 있는 주인공은 과거의 상흔에서 헤어 나오지 못하는 존재이다. 그러나 주인공은 현실과 환상의 세계를 넘나들며, 부정했던 과거와 현재 사이의 이질감을 인정하고 받아들이기 시작한다. 지난한 과정의 끝에서 다시 현실로 돌아온 주인공은, 지금 마주하는 이들의 소중함을 느끼고 현실을 인정하게 된다. 그 끝에서 아흔에 가까운 감독은 주인공에게, 그리고 관객들에게 질문을 던진다.
그대들은 어떻게 살 것인가.
예술가는, 삶의 종착역에 다다른 노인은 관객들의 시선을 미래로 돌려놓는다. 그 누구도 가보지 않은, 그래서 무한한 가능성이 존재하는 미래를 보며 살아가라고. 감독은 현재를 구성하는 시간의 질료를 과거가 아닌 미래에서 찾기를 당부한다.
현대 사회의 서사는 위기를 맞이하고 있다. 사람들은 서로를 이해하는 데 어려움을 겪으며, 쏟아드는 정보는 판단과 비판, 논쟁을 유도한다. 맥락은 몇 줄의 글귀로 손쉽게 정리되며, 서사 자체도 소비주의적 흐름에 휘날리며 이용된다. 하지만, 부조리한 그 어떤 사회에서도 희망은 양립해왔다. 얼굴을 맞대고 감정적으로 교류하며, 서로의 이야기를 나누고 상대방을 있는 그대로 바라보는 것. 서사가 맞이한 위기는, 또한 서사의 중요성을 다시금 느낄 수 있는 계기로 자리할 수도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