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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주현석 Nov 06. 2023

잠들지 않으면 깨어날 수 없다.

잠들지 않으면 깨어날 수 없다.(애스터로이드 시티,2023)



잠들지 않으면 깨어날 수 없다. 언뜻 보면 당연한 명제다. 아침은 밤을 건너 이루어지기 마련이다.

하지만, 이 당연한 문장이 좀처럼 받아들여지지 않는다.


현대인의 미덕은 열정과 의지, 자기 계발과 성공이다. 하루를 알차게 살아간다는 의미의 ‘갓생’이라는 용어가 이곳저곳에서 통용된다. 자기 계발서들은 한목소리로 ‘깨어있으라’라고 주문한다. 하루 3-4시간 자며 미친 듯이 일하여 성공한 사례들이 큼지막하게 실린다.


‘너도 할 수 있어.’


언뜻 보면 격려를 보내는 말 같지만, 이 문장은 묘하게 청자에게 부담을 준다. 실패는 너의 의지 부족에 기인한 것이라고. 격려는 실패를 죄로 단정 짓는다. 마치 당연히 할 수 있었다는 듯이.


깨어 있으라. 현대 사회에서 잠은 그 위상을 잃어버렸다. 잠은 게으름의 소산이자 실패에 대한 비겁한 도피처일 뿐이다. 잠을 자는 사람들을 향해 세상은 말한다. 당장 일어나라고. 네가 퍼질러 잘 동안 누군가는 피땀을 흘려가며 성공을 향하고 있다고. 숙면은 죄이다. 피로는 나약함이며 본능은 짐승의 것이다. 침대는 마치 오디세이를 유혹하는 세이렌처럼 묘사된다. 귀를 닫아라! 방문을 닫고 뒤를 돌아보지 말아라!


굳이 잠을 폄하하지 않더라도, 현대 사회에서 잠을 방해하는 요인들은 수두룩하다. 한 손에 잡히는 작은 기계 안에는 정보가 넘쳐흐른다. 손가락 몇 번 퉁기면 전 세계의 소식들과 자극적인 정보들이 물밀듯 밀려온다. 알고리즘은 뇌 속의 도파민을 끝없이 생산해 내어 잠의 영역에 빠져드는 것을 방해한다. 잠은 어느덧 자는 것이 아닌, 어느 순간 들어버리는 것이 된다. 잠은 수동적 행위가 되어버리고, 이는 잠 이후의 아침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이다. 영겁의 세월 끝에 확인한 인간의 자유의지를, 인간은 스스로 제어해버렸다. 우리는 어느덧 우리의 하루를 마무리할 자유마저 잃어버린 것이다.


죽음과 삶, 구스타프 클림트


클림트의 <죽음과 삶>이다. 그림 속, 죽음으로 상정되는 해골은 삶을 향해 감정을 자아내는 표정을 짓는다. 반대로 삶을 표방하는 인간들은 죽은 것처럼 잠들어 있다. 삶에서 죽음이 나타나고, 죽음에서 삶이 드러난다. 클림트는 죽음과 삶을 대칭적으로 여기는 사고방식에서 벗어난다. 그는 죽음과 삶이 하나의 세계 안에 공존함을 나타낸다. 삶을 살아내는 사람들은 잠을 잔다. 하루가 잠을 향해 달려가듯, 잠을 자야 하루의 생이 이어지듯, 삶은 죽음이라는 끝을 향해 지속된다. 삶은 죽음으로 완성되며, 생은 잠으로 완성된다. 잠은 삶에서 맞이하는 순간의 죽음인 것이다.


잠은 숭고한 것으로 여겨진다. 고대 신화 속 신의 계시는 인간이 잠이 들었을 때 주어진다. 사랑의 행위는 잠으로 묘사되며 잠든 자의 곁에서 깨어 있는 자들은 숨을 죽인다. 잠은 하루를 살아내는 동안 담아둔 감정과 인상, 사고의 잔해물들이 게워지는 출구이다. 잠은 하루를 살아낼 동력을 제공하는 발전소이며 감춰둔 욕망이 발현되는 배출구이다. 잠에서 깨어난 인간은 비워진 내부의 세계를 다시 부지런히 채워간다.


그러나, 현대 사회에서 잠은 사라져버렸다. 잠은 나태함의 상징이 되어버렸으며, 그마저도 온갖 자극들이 온전한 잠을 방해한다. 잠이 없어진 사회에서 사람들은 하루를 살아갈 동력을 잃어버렸다. 전날의 응어리진 감정들과 인상, 사고의 잔해들은 걸러지지 못한 채 오늘의 것들과 섞여 들어간다. 감춰둔 욕망은 배출되지 못한 채 억제하기 위한 더 큰 힘을 요구한다. 이미 가득 찬 내부에 새로운 것을 넣기 위해 안간힘을 쓴다. 그러는 동안 인간 내부의 어느 한 귀퉁이가 벌어지기 시작한다. 점차 커지는 틈이 쌓여가는 잔해물들을 버티지 못하면 일시에 터져버리고 만다. 감당할 수 없게 된 침전물들은 터져 나오며 충격파를 일으킨다. 충격파는 내면으로 침잠하거나, 외부로 분출된다. 내면을 향한 인간은 스스로 파멸한다. 외부로 향한 인간은 주변을 파멸시킨다. 전자에 대해 우리는 점차 무감해진다. 후자에 대해, 그들은 괴물이라 불린다.


스스로 침잠하여 사라지는 인간들을 흘려보내고, 괴물들을 제거한다면 세상은 정상적으로 돌아가는가. 허울뿐인 정상이다. 피로의 과부하는 곳곳에서 드러난다. 소수의 극단에 가려진 이면에는, 전체적인 내면의 포화를 안고 있다. 여유가 사라지자 극도의 예민함이 자리한다. 서로는 서로에게 더 이상 우호적이지 않다. 서로는 단지 또 다른 하나의 짐인 것이다. 그들은 오늘도 잠을 방해하는 온갖 것들 속에서 힘든 숙면을 이룬다. 밤은 새벽으로 넘어가고, 아침은 너무나 빨리 찾아온다. 그렇게 하루는 다시 시작되는 것이다. 무거운 몸을 다시금 일으키면서.


잠들지 않으면 깨어날 수 없다. 하지만, 현대 사회에서 우리는 깨어 있는 채, 잠이 들지 못하고 있다. 이 역설적인 현실은 우리가 온전히 깨어나지 못하고 있음을 시사한다. 반쯤 몽롱한 정신 속에서 배출되지 못한 욕구와 감정, 피로와 분노가 무차별적으로 터져 나온다. 미리 이를 막을 수는 없는가. 남은 자들 역시 간신히 정신을 붙잡고 있을 뿐이다. 이 피로한 세상에서 우리는 억지로 두 눈을 부릅 떠가며 살아간다. 우리에겐 정신을 차림과 동시에 하루를 살아내라는 이중의 요구가 주어진다.


버겁다. 하지만 이 말조차 어려운 세상이다.


잠들지 않으면 깨어날 수 없다.

그러므로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깨어나는 것 이전에 깊이 잠드는 것이다.

바다에서 뼈만 남은 청새치와 함께 돌아온 노인이 사자 꿈을 꾸며 잠의 세계로 건너가는 것처럼,

치열하게 하루를 살아낸 우리는 깊은 잠으로 향할 자격이 있기에.


그러니 우리의 잠은 충분한 이유를 지닌다.

그 모든 감정의 잔해도, 걱정과 불안도, 슬픔과 후회도.

미처 드러내지 못한 진심도, 참아낸 욕망도, 쌓아둔 피로도, 버겁던 시간도​


그 모든 것들이 세계 너머의 한 지점을 향해 흘러가도록

급류에 휩쓸려 간 그 모든 것들이 하나의 점이 되도록

그래서 눈뜨는 아침이 더없이 상쾌하도록​


오늘은 조금 일찍 몸을 뉘어보는 것은 어떨까.

오늘은 잠보다 먼저 도착하여 맞이하는 것이다.​


당신을 향해 다가오는 오늘의 증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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