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리나 아브라모비치가 여기 있다(2012)>, <강변호텔(2019)>
행위 예술가 마리나 아브라모비치는 뉴욕 현대 미술관에서 전시를 기획한다. 제목은 <Marina Abramovic: The Artist Is Present>.
국내에서 번역된 제목과 달리, 원제는 ‘마리아 아브라모비치’와 ‘예술가’의 개념을 분리시킨다. 원제에서의 현존재는 ’그 예술가‘이다. 그녀의 이름은 그 모든 걸 포괄하며 독립적으로 존재한다. 여기 있는 자는 예술가이다. 그녀는 그 예술가이며 현재에 존재하지만, 이는 그녀 자체의 정의가 될 수 없다. 그녀는 존재했고, 존재한다. 그리고 앞으로도 존재할 것이다.
대중은 그녀의 과거를 지나 현존하는 예술가를 만난다. 그렇게 그들은 그녀라는 하나의 존재를 온전히 실감한다.
전시회에 입장한 관객들은 그녀가 해왔던 과거의 행위 예술 작품들을 접한다. 젊은 예술가들은 그녀의 작품들을 재현하며 관객들로 하여금 그녀가 지나왔던 시간과 예술적 층위를 경험하게 한다. 나체의 남녀 사이를 통과한 관객들은 해골 모형 아래 벌거벗은 채 누워있는 존재를 지나, 역시 나체로 벽에 박제된 채 두 팔을 허우적거리는 여성을 마주한다. 40여 년간 그녀가 행해왔던 행위예술의 통로를 지나며 그녀의 시간성과 합치된 관객들은, 비로소 현재의 시간으로 넘어와 의자에 앉아있는 그녀를 마주하게 된다. 그녀는 그 모든 과정을 지나 온 관객들을 가만히 응시한다. 그들은 그녀의 눈을 지그시 바라본다. 언어, 행위 등 모든 소통의 수단은 무용하다. 덩그러니 놓인 의자에 앉은 둘은, 그저 서로를 바라볼 뿐이다. 그들은 여기 있는 존재, 예술가를 마주한다. 그리고 그건, 어쩌면 그녀 또한 마찬가지일 것이다.
마리나 아브라모비치의 행위 예술은 그녀가 유년기 시절부터 간직해 온 상처들을 통해 발현된다. 엄격한 가정환경과 사랑의 (표현에 대한) 부재는 그녀로 하여금 내재된 감정의 응어리를 극단적 방식으로 표출하도록 이끌었다. 이러한 그녀의 예술적 발현은, 세간의 반응과 그녀의 결혼 및 이혼을 지나며 더욱 정교해진다. 그녀가 칼로 배에 상처를 내고, 채찍으로 자신을 때리며 벌거벗은 채 가장 나약한 모습을 대중 앞에 드러내는 데에는, 그녀가 살아오며 겪은 부조리와 상처에 대한 그녀의 잠재된 감정적 부산물일 것이다. 그러한 극단성이 무수한 비난을 겪으며 비로소 예술로서 인정받은 데에는, 그녀가 겪어 온 상처의 고통을 이제서야 대중들 또한 느꼈다는 점에 있을 것이다. 현대 미술관을 찾은 관객들이 상처로 얼룩진 그녀의 작품들을 지나 그녀를 마주했을 때, 그들은 대부분 눈물을 흘린다. 그 눈물은 그녀의 고행에 대한 숙연함과 더불어, 역시 삶을 살아내며 겪었던 자신의 상처에 대한 인식에 기인한다. 아무런 접점도 없이 각자의 삶을 살던 중 우연히 만난 예술가와 관객은, 서로의 삶에서 지녔던 상처를 매개로 상대방을 이해하기 시작한다.
그들은 서로를 이해한다.
그렇기에 그들은 아무 말 없이, 그저 눈물을 흘릴 뿐이다.
홍상수 감독의 <강변 호텔>.
강변 깊숙이 자리한 이 호텔에는 여자와 남자가 묵고 있다. 여자는 사랑하는 남자에게 버림받고 상처를 안은 채 이곳을 찾았으며, 남자는 아들과 처를 떠나 긴 세월을 헤매다 이곳에 묵는다. 각자 지닌 상처를 매개로 같은 공간에 머물게 된 둘에게는 동행객이 있다. 여자의 선배는 그녀를 위로하며 그녀를 버린 유부남에 대해 분노한다. 남자에게는 그를 찾아온 두 아들들이 있다. 과거에 대한 회환과 죽음의 불안을 털어놓는 그에게, 두 아들들은 걱정 말라며 재차 그를 위로한다.
쌓인 눈밭 속 마주한 남자와 여자는 서로에게 인사를 건넨다. 시인인 남자는 그녀를 위한 시를 건네고, 이제는 죽어도 여한이 없다고 한다. 깊은 밤 술집에서 다시 마주친 둘. 여자는 말없이 남자에게 술을 건넨다. 한 잔. 두 잔. 남자는 연거푸 술을 마신다. 그렇게 고요한 밤은 유유히 깊어간다.
다음 날 아침, 남자는 방 안에서 소망하던 끝을 맞이한다. 같은 층의 맨 끝에 위치한 그녀의 방 안, 그녀는 침대에서 조용히 숨죽여 흐느낀다.
선배는 여자를 이해한다. 고 한다. 여자의 상처에 선배는 공감한다. 유부남에게 배신당한 여자의 심정은 말해 무엇하랴.
하지만 여자의 감정은, 선배가 확신하는 분노의 성질인 것만은 아니다. 후회와 증오의 이면에는 그리움과 애틋함, 사랑과 애상이 있다. 여자가 유부남과 공유했던 감정의 시공간에 선배는 없었기에, 그녀의 이해는 끝내 온전히 닿지 못한다.
시를 읊는 남자. 그는 죽음을 목전에 두었다. 그와 그녀가 지나온 세상은 겹치지 않는다. 하지만 술잔에 술을 따르는 그 순간, 두 사람은 알아차린다. 서로의 지나온 삶에서 얻게 된 상처의 존재를. 선명한 상처를 지녔다는 공통점은, 서로를 세상 속 유일한 동질감으로 안내한다. 그들은 비로소 서로를 이해하는 것이다. 그들은 그저 술을 주고받는다.
그들은 서로를 판단하지 않는다. 남자는 여자에게 시를 읊어줄 뿐이다. 여자는 남자의 죽음에 눈물을 흘릴 뿐이다.
이해란 무엇인가.
아들은 부모를 이해한다. 선배는 아끼는 후배를 이해한다. 구성원들은 이웃을 이해하며 대중들은 예술을 이해한다.
대신 분노하고 슬퍼하며 보듬어주는 것. 그들은 상대를 이해한다고 자신한다.
그들은 때로는 충고와 조언을 서슴지 않는다. 이게 맞아. 그래야만 해.
남자와 여자는 타인이다. 대중과 예술가 역시 완벽한 남이다. 서로는 각자의 삶의 경로에 있어 조금도 겹치지 않는다.
그러한 그들이 서로의 한 부분을 주고받을 때, 비로소 그들은 발견한다. 각자의 삶에 자리한 상처를. 그제서야 서로의 이해는 설득력을 지닌다.
그들은 모두 상처를 지닌 존재이기 때문이다.
그들은 서로에게 위로의 말들을 건네지 않는다. 그저 각자의 상처를 느끼며 슬퍼하는 것. 그것이 최선의 위로임을 너무나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들은 서로를 이해한다.
그렇기에 아무 말하지 않는다. 섣불리 위로를 건네지 않는다. 그저 서로를 바라보고, 말없이 술을 건네며 따뜻한 눈물을 흘릴 뿐이다.
이해란, 이성이 아닌 감정의 영역이다.
이해는 상대에 대한 지식을 근거로 형성한 생각이 아닌
상대와 같은 상처를 꺼내 보인 채로 서로의 슬픔에 대해 감각하는 것이다.
감각은 대개 언어가 아닌 신체를 통해 발현되기에,
우리는 이해하며 단지 눈물과 미소를 지어 보인다.
이해는 서로를 느끼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