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빛의 제국(김영하)> 리뷰
르네 마그리트의 <빛의 제국> 연작은 초현실적인 요소가 특징인 작품이다. 그림 속 하늘은 티 없이 맑은 데 비해, 집을 둘러싼 숲이 즐비한 하늘 아래는 온통 어둠으로 뒤덮여 있다. 극명한 명암의 대비 속 암흑의 중심부에 놓인 가로등은 어둠을 밝히는 유일한 존재다. 하나뿐인 가로등 불빛은 언뜻 처연하게 느껴지면서도, 극명한 명암의 대비는 그러한 불빛의 존재에 대해 냉소를 던지는 느낌을 주기도 한다. 통상 빛은 희망으로 여겨진다. 너무나 명징한 희망은 저 위에 있어 닿을 수 없으며, 주위는 온통 어둠(절망) 뿐인 세상에서 외로운 불빛(희망)은 한없이 가냘프다.
김영하의 소설 <빛의 제국>은 르네 마그리트의 작품에서 제목을 따온 동명의 장편이다. 소설은 북에서 남으로 간첩 활동을 위해 내려온 김기영이 북한 연락 라인이 끊기게 되자 과거를 잊은 채 남한에서의 삶을 이어가던 중, 어느 날 북한으로부터 귀환하라는 지령을 받게 되는 이야기를 다룬다. 지령 확인 후 북으로 떠날 채비를 하는 이 하루 동안, 소설은 기영과 그의 아내 마리, 그들의 딸 현미의 시점에서 각자의 이야기를 중점적으로 다룬다. 그 과정에서 서로 다른 시간과 공간을 살아가는 그들의 삶의 단면들이 드러난다. 그들의 삶은 그들이 지나온 날들의 궤적만큼 너무나도 다르며, 또한 그 이질성 속에서 치열함이라는 어떤 공통점이 보이기도 한다.
북에서 간첩활동을 위해 남으로 넘어와 신분을 속인 채 21년을 남에서 살아가는 기영에게 있어 삶은 ‘운명’이다. 그가 태어난 사회는 개인의 삶을 인정하지 않는다. 개인은 국가에 귀속되며 삶이란 국가의 번영과 발전을 위한 필연적 실존이다. 기영의 삶의 항로는 그가 태어난 그 순간에 이미 정해지게 된 것이다. 기영은 남으로 넘어온 후 북한과의 연락망이 끊기자 당혹감을 느낀다. 하지만, 그의 역할은 애초에 남에서 정착하여 남한의 사람들처럼 평범하게 살아가는 것이다. 그는 주어진 운명을 수용한다. 대학 운동권 동아리에서 마리를 만나 결혼하고 현미를 낳으며, 영화를 수출입하며 근근이 생계를 마련하며, 그리고 틈틈이 소설을 읽으며. 그러던 중 그는 어느 날 북으로의 송환 지령을 받는다. 운명은 그를 떠나지 않았고, 그는 여전히 거대한 삶의 파도 속에 잠식해 있었다. 단지 그 자신이 깨닫지 못했을 뿐.
그의 삶은 하나의 거대한 운명의 소용돌이이다. 소멸하는 지점이 너무나도 명확하게 보이는.
그런데 하나의 절차가 다른 하나의 절차를 물고 들어갔다. 작은 결정이 또 다른 작은 결정으로 이어졌고, 마침내는 돌이킬 수 없는 결정으로 이어진 것이다. 그것들은 모두 연결되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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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 지금의 그녀를 붙들고 있는 것은 그 알량한 신용카드였다. 결제만 하지 않았더라도! 그녀는 생각했다.
p347
반면, 남에서 나고 자란 마리의 삶은 철저히 ‘우연’의 산물이다. 장애가 있는 오빠를 둔 것도, 어머니의 우울증이 심했던 것도, 역도산이 죽은 날 맹장염을 앓고 그를 추동하던 아버지가 죽기 전까지 세금 타령이나 했던 것도. 우연은 어떠한 명징한 기준이나 흐름이 없기에 그녀는 끊임없이 삶을 헤맨다. 자기를 들이받으려 했던 산타페의 운전자를 찾아가 화를 내며 머리채를 잡지만 공권력에 의해 오히려 자신이 제지당한다. 분노가 치미는 데 이를 향할 곳이 없다. 배출되지 못한 분노는 켜켜이 쌓여 내부로 향한다. 이렇듯 부조리한 삶의 우연성을 쥐고 흔드는 것은 다름 아닌 남한의 ‘자본주의’이다. 그녀의 아버지는 죽는 순간까지 돈을 입에 올렸다. 그녀는 20대 초반의 남자와 그의 친구와 관계를 맺기 위해 모텔에 들어가 굳이 그녀의 신용카드로 계산을 한다. 자신의 지불을 통해 사건에 대해 주도적 의미를 부여하려 하지만, 그 알량한 자본은 우연에 휘둘리는 그녀의 삶을 그저 바라볼 뿐이다. 그녀의 자기합리화를 마음껏 비웃으면서.
기영과 마리는 각자 다른 삶의 방식을 지나온다. 하지만 이러한 이질성에는 겹치는 부분이 존재한다. 그들은 각각 운명이라는, 그리고 우연이라는 삶의 파도에 휩쓸려 자신을 잃는다. 그들이 어릴 적 꿈꿨던 낙원은 저 하늘 높은 곳에서 여전히 빛나고 있지만, 그들이 발 닿은 현실 주변은 온통 어둠뿐이다. 그들이 가졌던 희망의 불씨는 연료가 다해 희미하게 반짝거릴 뿐이다. 이 빛이 꺼지면 그들은 이 칠흑 같은 세상에서 사라져 보이지 않게 되리라. 그저 어둠뿐인 세상의 일부가 되어버리는 것이다. 그들의 머리 위로 하늘은 여전히 밝게 빛나는 채로. 그들의 제국은 그저 신기루였으며 한때의 몽상이었다. 화염병을 던지며 구호를 외치던 운동권 시절의 순수한 이상처럼.
철이라는 애는 존재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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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철이라는 애를 죽여버리고, 그러니까 진국의 상상 속에서 지워버리고 그 자리에 자신이 들어가고야 말겠다고 다짐했다.
p404
그러나 이 이야기에는 기영과 마리 외에 한 명의 인물이 더 있다. 바로 그들의 딸, 현미이다.
중학생인 현미는 머리 좋고 성실한 아이이다. 사춘기 아이가 으레 그렇듯 엄마와 아빠를 별로 못마땅해하면서도 은연중에 관심을 바란다. 탈 없이 당차게 살아온 현미 앞에 어느 날 나타난 진국은 현미의 삶을 흔들어놓는다. 현미는 진국에게 관심을 가지게 되고, 우연히 틈입한 감정은 그녀를 혼란에 빠뜨린다. 현미는 삶의 균형이 잠시 흔들리게 되고, 친한 친구인 아영과도 소원해진다. 이런저런 일들을 겪은 후에야 겨우 진국을 만난 현미는 그와 첫 키스를 나눈다. 그녀의 세계로 불쑥 들어온 진국. 그리고 그가 ‘철이’라는 아이와 방에서 동거한다는 소식까지. 우연이 겹쳐 만들어낸 거대한 조류는 그녀를 속절없이 떠다니게 할 뿐이다.
현미는 복잡함을 안고 집에 와 기영에 대해 모든 것을 알게 된 마리와 마주친다. 역시 우연에 떠다니다 지쳐 쓰러진 그녀를 보며, 현미는 깨닫는다. 철이라는 애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말이다.
철이는 존재하지 않는다. 우연이 삶을 만들어내지만, 그 삶이란 매번 진실은 아닐지도 모른다. 언어가, 거울이, 매체가 부유하는 허상의 세계 속 현미는 마침내 우연이 만들어낸 거짓을 목도한다. 그리고 다짐한다. 그 우연을 직접 깨부수기로. 그녀는 그녀가 속한 ‘우연’이라는 삶을 자신의 ‘운명’으로 바꾸어나가기로 결심한다. 그녀의 삶은 같은 사회를 공유했던 마리의 인생을 닮았었지만, 아버지인 기영의 운명적 삶을 향해 나아간다. 하지만 현미는 기영과 다르다. 그녀는 기영과 달리, 자신의 삶을 ‘스스로’ 만들어나가는 것이다. 그것이 개인의 자유가 허락된 이곳 사회가 말하는 ‘운명’이다. 비록 그 과정이 험난하고 고통스러울지라도. 그 결심의 자유는, 실행의 공간은 누구에게나 열려있다. 다만, 그것은 이를 지각하는 자에게만 주어지는 특권인 것이다.
르네 마그리트의 <빛의 제국> 연작은 초현실적인 요소가 특징인 작품이다. 그림 속 하늘은 티 없이 맑은 데 비해, 집을 둘러싼 숲이 즐비한 하늘 아래는 온통 어둠으로 뒤덮여 있다. 극명한 명암의 대비 속 암흑의 중심부에서 집 앞에 놓인 가로등은 어둠을 밝히는 유일한 존재다. 하나뿐인 가로등 불빛이 언뜻 처연하게 느껴지면서도, 극명한 명암의 대비는 그러한 불빛의 존재에 대해 냉소를 던지는 느낌을 주기도 한다. 통상 빛은 희망으로 여겨진다. 너무나 명징한 희망은 저 위에 있어 닿을 수 없으며, 주위는 온통 어둠(절망) 뿐인 세상에서 외로운 불빛(희망)은 한없이 가냘프다.
본문 윗부분
아니다. 이 그림에는 어둠 속에 존재하는 빛이 하나가 아니다. 가로등 불빛의 왼쪽을 자세히 보면, 창문을 통해 내부의 빛이 가득 반짝이는 것을 볼 수 있다. 방에 누군가가, 삶이 존재한다는 것이다. 이 어둠 속에는 가로등이 지탱하는 희미한 희망만이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외로이 서 있는 집 안에 숨을 내뱉는 생명의 온기가 있다. 그가 내뿜는 숨결과 함께 반짝이며 퍼지는 빛이 있다. 마그리트의 제국 속 빛은, 희망은 삶이다. 희망은 인간이며, 인간이 살아왔고 살아있으며 살아간다는, 실존 그 자체이다. 우리는 살아있다는 그 자체로 거대한 희망의 단초를 안고 간다. 물론 세상은 지독히 어둡고 맑은 하늘은 너무나 멀리 있다. 하지만, 어둠을 비관하며 꺼져가는 가로등 불빛만을 하염없이 바라보는 자와, 스스로가 불빛이 되어 지상에서 또 하나의 ‘밝음’을 피워내는 자의 삶은 다를 것이다. 우연과 운명에 휘둘리는 삶과 우연을 휘둘러 운명으로 만드는 삶. 우리 앞에는 서로 다른 두 제국이 놓여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