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기 앞의 생>, 에밀 아자르
자연스럽다.
1. 억지로 꾸미지 아니하여 이상함이 없다.
2. 순리에 맞고 당연하다.
흔히 '자연스럽다'라는 표현은 우호적인 시선을 내포한다. 인간의 때가 타지 않은 자연은 그렇기에 본래적인 순수함으로 나타내어지곤 한다. 이는 곳곳에 범람하는 인공적인 사물들에 대한 염증에서 기인한 희구일지도 모른다. 어느 순간 사람들은 자연스러움을 추구하며, 인위적 대상에 대해서도 얼마나 작위적으로 느껴지지 않는가를 중시한다. '자연'이라는 불가침의 영역에 대한 끊임없는 선전과 학습은 어느덧 우리의 사고방식에 있어 '자연'을 최상의 가치로 여기게끔 하는 결과를 낳았다.
하지만, 우리가 사용하는 '자연'이라는 개념은 과연 우리가 표현하고자 하는 가치와 일맥상통하는가에 대해서는 조금 더 생각해 볼 여지가 있다. 우리는 '자연스러움'을 익숙하고 친근함을 나타내는 데 사용하곤 한다. 이는 자연에 대한 우리의 기대 : 어긋남이 없고 순리에 맞으며 우리의 사고방식을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는 사유가 기저에 깔려있다. 즉, '자연스럽다'는 '받아들여질만하다'라는 생각을 내포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자연은 우리의 기대를 매번 충족시키는 것은 아니다. 우리는 파릇파릇한 풀이 돋아나고 생명력이 넘치는 풍경을 떠올리지만, 이는 자연의 단면일 뿐이다. 거세게 내리치는 폭풍우의 파괴성, 불을 뿜는 화산의 폭발력과 더불어 동물과 인간의 배설, 성욕, 살육과 전염병. 그 모든 것들 역시 자연의 일부이며 우리 삶에 존재하는 하나의 현상이다. 우리는 이러한 것들에 대해 외면하며 터부시하지만, 이러한 것들은 엄연히 '자연스럽다'의 범주에 포함될 수 있다. 이 모든 것들은 우리 주변에 상존하는, 너무나 당연하고 일상적인 '자연스러움'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 모든 것들에 대해 '자연스러움'이라는 개념을 부과하고 있는가. 불행히도 그렇지 않다. 우리가 사용하는 이 개념은 본래의 의미와는 달리 다분히도 주관적인 가치를 내포하는 인위적 표현이기 때문이다. 그저 존재할 뿐인 '자연'은 하나의 표현이 됨으로써 어떠한 상황을 판단하는 하나의 기준이 되어버렸다. 자연스럽지 않은 것들은 비도덕한 것을 의미하도록 되어버린 것이다. 자연스러움은 하나의 도덕적 판단 근거가 되어버렸다.
로맹 가리가 '에밀 아자르'라는 이름을 차용하여 완성한 소설 <자기 앞의 생>에도 이러한 아이러니가 소개된다. 주인공 모모는 아랍인 포주 남자와 그가 관리하는 여자 사이에서 태어난 아이이다. 남자는 몸을 파는 아내를 의심하다 결국 그녀를 죽이게 되고, 정신병을 근거로 수감 대신 병원 신세를 지게 된다. 홀로 남은 아이는 늙은 포주인 로자 아줌마가 맡아 키우게 된다. 아이는 주변을 둘러싼 부조리한 세상으로부터 일찍이 현실감각을 얻게 된다. 아이는 몸을 팔아 돈을 버는 부모와 양육인, 다인종의 친구들과 성적 소수자, 주변의 끊임없는 강도, 살인 등의 범죄에 대해 지각한다. 아이에게 있어 이 모든 것들은 당연히 존재하는 자연스러움이다. 하지만, 세상은 아이의 자연을 그들의 자연으로 받아들이지 않는다. 로자 아줌마는 늙고 병들었지만 제대로 된 치료는 고사하고 마음대로 죽을 수조차 없다. 트랜스젠더인 롤라 아줌마는 성적 순리를 거슬렀다는 이유로 경멸 어린 시선을 받는다. 아랍인이라는 이유로 모모는 때로 편견에 시달리며 언제든지 빈민 구제소로 보내질 위기에 처한다. 출생 성분, 성적 지향, 노화, 질병 이 모든 자연스러움은, 외부의 시선에서는 그저 불결한 사회의 단면일 뿐이다. 병든 로자 아줌마가 가리지 못하는 대소변처럼 인간의 자연스러운 현상은, '자연스럽다'라는 고매하고 순수한 범주에 들기에는 적합하지 않은 것이다.
자연은 물론 위대하며 필수적인 삶의 요소이다. 하지만, 이러한 개념에 대해 우리가 부과하는 가치는 과연 정당한가. 이에 대해서는 재고할 필요가 있다. 언어는 인간의 가장 큰 무기이다. 관념적 사유에 언어라는 명료성에 덧입혀지면, 이는 인간에게 실제로 영향을 미칠 수 있는 강력함을 지니게 된다. 그러므로 우리는 언어를 사용함에 있어 더없이 신중해야 하는 것이다. 우리가 광범위하게 사용하는 '자연스러움'이 혹시 누군가의 자연스러운 세계를 파괴하고 있지는 않은가. 누군가의 삶에 대해 주관적 잣대를 들이밂으로써 개별적 상황을 고려하지 않은 채 멋대로 단정 짓는 것은 아닌가. 우리의 자연스러움이 정말 모두의 자연을 담고 있는 것인지 다시 한번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