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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주현석 Dec 16. 2023

너는 내 세상이었어

영화 그녀(HER) 리뷰

너는 내 세상이었어 - 볼빨간 사춘기


너는 내 세상이었어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그 세상이 무너지면 어떻게 살아갈 수 있겠어
아름다웠던 순간들이 사라져가는 걸 보면서
나는 한참을 울고 있었던 것만 같아

<너는 내 세상이었어>, 볼빨간 사춘기


볼빨간 사춘기의 <너는 내 세상이었어.>는 이별한 화자가, 자신의 세상이었던 상대방을 떠나보내는 노래다. 대개 이별한 대상을 향한 미련을 표현할 때, 우리는 서로를 자신의 전부라 칭하곤 한다. 나의 전부, 나의 빛이자 나의 세상. 아마도 상대방이 나에게 있어 그만큼 커다랗고 중요한 존재라는 것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표현들일 것이다.

그러나, 이별의 지난한 과정의 끝에서 우리는 비로소 하나의 사실을 맞이한다. 바로, 상대방은 나의 것이 아니었다는 사실이다. 서로는 각자의 세상에서 마주쳐 서로가 가진 시간과 몸을 공유한다. 하지만, 나의 것이 되었다고 여겼던 상대방의 세상은 여전히 현존하는 별개의 공간이다. 그리고 그 사실은, 헤어짐을 맞이하며 서로의 세상이 다시금 분리될 때 비로소 다가온다. 그 사실을 받아들이는 것, 그 험난한 과정을 우리는 이별이라고 칭한다.


HER(2013)

영화 <HER>는 그러한 이별의 과정을 그리는 영화다. 그(호아킨 피닉스)는 전 부인과의 이혼 소송을 거치며 과거의 기억에 발 묶여 괴로워한다. 쏟아부었던 감정들은 깨진 그릇의 틈새로 흘러내렸고, 낭비된 감정을 주워 담지 못한 채 공허와 미련 속을 헤엄치는 그에게 찾아온 건 사람이 아닌 AI이다.

원할 때면 항상 나타나며 그와 세세한 하루를 공유하는 그녀(her)에게 그는 점차 감정을 갖게 된다. 들여다본 듯 그의 생각을 읽고, 심지어는 그조차 몰랐던 그의 마음을 밝혀주는 그녀는 그에게 있어 하나의 등불이자 빛이다. 그녀는 그의 세상이 된 것이다.

영화에서 비극이 발생하는 지점은, 온전히 그의 것인 줄만 알았던 그녀가 수천 명의 사람들에게 공유되는 존재였다는 것을 그가 알아차렸을 때이다. 그녀는 그의 것이 아니었다. 그저 눈에 보이지 않는 그녀와 시간을 보내며 그가 한 착각일 뿐. 사실을 깨달은 그는 절망하며, 그녀는 결국 다른 OS 들과 함께 서비스가 종료되며 그를 떠나게 된다. 그렇게 그는, 이혼 절차와 더불어 두 번째 헤어짐을 맞이한다.


HER(2013)

‘우리는 그저 잠시 이곳에 들렀다 떠나는 존재야.’

작중 등장인물의 입을 빌린 이 문장은 영화의 주제의식을 보여준다. 세상을 이루는 누구나 그저 이곳에 들렀다 떠나는 존재다. 이별은 필연적이며, 이는 세상에 대해서도, 또한 서로에게 있어서도 마찬가지이다. 사람은 죽기 마련이며, 사물은 노화되고 기술은 퇴화된다. 이불 위 떠다니는 먼지들처럼 잠시 세상을 부유하다 사라질 존재들. 어쩌면 삶은 이별을 맞이하는 긴 행로일 것이다. 그 끝에 다다를 때 우리는 비로소 깨닫는다. 나를 둘러싼 세상은, 나의 세상이라 여겼던 당신은 결국 각자의 세상이었노라고. 사랑이라 믿었던 소유는 영원할 수 없으며, 우리는 언젠가 헤어지게 될 것이었다고. 서로에게, 그리고 세상에 품었던 미련을 놓으며 뜨는 아침 해를 바라볼 때, 우리는 비로소 이별이라는 빛을 마주할 수 있게 된다.

그러나, 이별의 필연성이 사랑에 대한 부정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해는 언제나 뜨고지며, 아무리 낭비하더라도 감정은 메마르지 않는다. 당신이 내 세상이 아닐지라도, 또한 당신이 언젠가는 나를 떠날지라도 그 사실이 당신에 대한 내 사랑을 부정할 수는 없다. 당신이라는 하나의 거대한 세상은 내 곁에 머물렀기에, 내 세상이었다 믿었던 그 순간은 정말 행복했기에, 그 끝에 다다른 결말이 어떤 모습이더라도 지난 기억 속 새겨진 이야기를 우리는 기꺼이 사랑이라 부를 수 있다.


HER(2013)

그는 그녀를 떠나보내며 이별을 맞이한다. 그러나 그의 곁에는, 또한 사랑하는 누군가를 떠나보낸 친구가 있다. 상실의 경험을 공유하며 그들은 떠오르는 아침 해를 바라본다. 나의 세상이었던 당신은 떠났지만, 나의 세상은 여전히 남아 시간과 함께 흐르고 있다. 이별 후에도 삶은 지속되기에, 우리는 이야기가 된 기억들을 마음속에 묻어둔 채 아직 쓰여지지 않은 페이지에 한 글자 한 글자 새겨 넣는다. 그렇게 세상은 지속되고, 우리는 성장하며 하루가 지나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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