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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주현석 May 11. 2024

외부자

주절주절 #9

#외부자


교복은 개인이 어느 집단에 속해 있는가를 알 수 있게끔 하는 확실한 지표이다. 학교별로 다른 디자인의 교복 상의 한켠에는 각자의 이름이 궁서체로 수 놓여 있다. 교복을 입은 학생들은 자기 학교에 자유자재로 드나들 자격을 얻는다. 물론, 소속되지 않은 집단에 대해서는 이야기가 다르다. 철저히 외부자인 이들이 접근을 제한당하는 가장 큰 이유는, 그들의 옷이 뚜렷하게 나타내는 사회적 정체성에 기인한다.

금요일 퇴근 전, 학교에 찾아온 한 무리의 중학생들 역시 교복 차림이었다. 가슴에 큼지막하게 이름이 적힌 이들은, 아마도 예전에 우리 초등학교를 다녔던 졸업생이었을 것이다. 전에 자신들이 그렸던 그림과 뛰놀았던 다락방 등 과거의 흔적들을 찾아 이들은 떠들썩하게 이곳저곳을 오갔다. 시간이 흐르고 사소한 것들이 바뀌었지만, 그들이 다녔던 목재 건물은 다소 색이 바랬을 뿐 여전한 구조와 공간감을 간직한 채 그 자리에 머물러 있었다.

잔뜩 신이 난 채 구경을 이어가던 학생들은, 그러나 곧이어 그들을 발견한 관리자에 의해 제제당했다. 학교에 출입하는 외부 방문객은 필히 행정실에 들러 용무를 신고한 후, 방문증을 수령해야 한다. 최근 여러 사건사고들이 연이어 발생하며, 외부자에 대한 기관 내 경각심이 상당한 실정이다. 그러니, 관리자로서는 당연히 이들을 내보내야 할 의무가 있는 것이다. 죄송하다며 허리를 굽히고서 학교 밖을 나서는 아이들의 뒷모습이, 역시 퇴근길에 학교를 나서는 내 시야에 한동안 아른거렸다. 어색한 헛기침과 함께 머리를 긁적이던 아이들은 서서히 멀어졌고, 그들이 떠난 빈 교정은 다시금 고요가 감돌았다.

한때 초등학생이었을 아이들에게 이곳은 집이나 다름없는 공간이다. 하루의 절반 가까이를 생활하며 학생들과 선생님과 부대끼는 학교라는 공간적 특수성은, 아이들로 하여금 유년의 기억 이상의 의미를 새기게끔 한다. 작년 졸업생들만 하더라도 올해 학교에 찾아오는 경우를 심심찮게 볼 수 있었다. 시간이 흘렀지만, 그들에게 학교는 여전히 집이자 놀이터이며 공원이다.

그러나, 졸업 후 학교를 떠난 이들은 외부자가 된다. 중학교라는 새로운 집단에 소속되고, 교복이라는 정체성을 부여받은 이들에게 초등학교는 더 이상 구성원의 자격을 건네줄 수 없다. 1학년 아이들이 새로 입학하고, 5학년 아이들이 6학년으로 진학하면서 과거 그들이 머물렀던 자리를 부지런히 채운다. 중학생이 된 아이들에게 초등학교는 더 이상 실재하는 소속 집단으로 기능하지 않는다. 과거 그들이 다녔던 추억은 단지 관념으로만 머무르며, 기억의 근원을 찾아 돌아온 건물은 전처럼 자유롭게 그들을 받아들일 수 없다. 아무리 과거의 관계를 증명하며 목소리를 높여 봐도, 외부자인 학생들에게는 방문 사유와 방문증을 요구하는 일련의 절차만이 제시될 뿐이다. 그들이 앉아 수업을 들었던 교실은 이미 그들의 것이 아니다. 학급 소개란 그 어디에도 그들의 이름은 보이지 않는다.

시간의 법칙 아래 삶을 구가하는 우리는 저마다 필연적인 외부자의 자격을 부여받는다. 정든 학교는 언젠가 졸업하게 되며, 인생을 바쳤다 여기던 직장도 퇴직이라는 결말이 기다리고 있다. 삶의 시작을 함께한 가족과 평생을 기약한 연인도 결국엔 이별할 존재들이며, 나 역시 이 거대하고 기나긴 삶의 여로에서 언젠가는 작별을 고해야 할 것이다. 머물렀던 자리는 떠난 이들의 공간을 남겨놓지 않는다. 그저 담담히 인사를 건넨 후, 새로 들어오는 누군가를 다시금 맞이할 뿐이다. 떠나는 학생들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나는 차마 나가라고 하지 못했던 나 자신을 돌아봤다. 머쓱함과 아쉬움을 드러내던 학생들의 표정에서, 나는 나 역시 매 순간 느껴왔던 외부자의 미련을 보았는지도 모르겠다. 갈색 복도를 터벅터벅 걸어가며, 나는 현재와 과거, 추억과 미련이 뒤섞인 이 공간을 반추했다. 여전한 온기와 색채를 간직한 채 학교는 새로이 세상에 착륙한 이들을 맞이하며, 곧이어 외부자가 될 아이들을 위한 작별을 준비하고 있었다.



#호출


회식이 있어 선생님과 함께 집 근처에서 만나 택시를 타기로 하였다. 택시 호출 어플에 접속한 후, 현재 위치를 GPS로 잡고서 호출 버튼을 누르자, 곧이어 근처에 있는 기사님과 연결되었다. 5분 정도였던 예상 시간은, 그러나 GPS가 현재 우리가 있는 위치를 잘못 잡은 탓에 10분을 훌쩍 넘겼고, 한참을 엇갈리고 나서야 택시와 우리는 만날 수 있었다. 화가 잔뜩 난 택시 아저씨는 우리에게 외마디 분노를 쏟아내셨고, 위치를 제대로 확인하지 못한 나는 연거푸 사과를 드렸다. 격양된 감정이 점차 가라앉자, 머쓱해진 택시 아저씨는 분노를 호출 시스템으로 돌리셨다. ‘이 지랄맞은 어플이 시장을 독점하더니 이렇게 양아치처럼 일을 한다니까요!’ 덕분에 우리는 약속 장소에 가는 동안 대기업의 횡포와 문어발식 경영, 부실한 사후 관리 시스템과 더불어 하루에도 몇 건씩 발생하는 이러한 상황에 대한 기사들의 응축된 분노를 귀가 닳도록 듣게 되었다.

사회가 복잡해지고 기술이 발달하면서, 1 대 1로 직접 누군가와 관계하는 경우가 눈에 띄게 줄어드는 중이다. 단순한 계산도 카드 회사를 거치게 되며, 그마저도 온라인 택배로 이루어지는 경우가 허다하다. 과거 손을 흔들 뿐이었던 택시 호출도 기업에서 제공한 서비스를 이용하는 시대에, 편리함이라는 가치의 이면에는 책임을 양도한 주체들이 느끼게 되는 미묘한 불만과 분노가 자리한다. 예상 시간이 명시된 호출 시스템은, 시간보다 조금만 늦어져도 짜증을 불러일으킨다. 위치를 못 잡는 GPS는 헛고생을 밥 먹듯 하는 기사들로 하여금 분노를 유발한다. 비가시적인 시스템으로 인해 쌓인 각자의 불만은, 서로가 마주했을 때 갈등으로 터지기에 이른다. 어플은 눈에 보이지 않으므로 각자의 분노를 표현할 수 있는 존재는 서로밖에 없는 것이다. 이 부조리함은, 매개에 대한 통찰이 없기에 몰이해의 결과를 낳는다.

우리는 영향을 주고받는 존재가 직접 마주하는 서로일 뿐이라 여기지만, 사실 삶의 곳곳에는 비정형의 매개체가 잔존한다. 그들은 눈에 보이지 않기에 책임을 묻기가 어려우며, 그럼에도 깊숙이 삶을 파고든 채 우리 주위를 넘나든다. 그렇다면 견고한 체계 앞에 얼굴을 맞댄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무엇이 있을까. 아마도 그것은, 부조리의 존재를 인정하고 서로를 친절하게 대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이 불편함과 분노가 온전히 당신의 탓만은 아님을 이해하는 것. 또한 그럼에도 나의 영향이 존재할 수 있음을 인정하는 것. 약속 장소에 도착한 후, 택시 아저씨는 목소리를 높인 것에 사과를 건네셨고, 나 역시 다시 한번 확인하지 못한 부분을 사과드렸다. 나는 아저씨께 카드를 건넸고, 카드 회사는 나의 계좌에서 현금을 출금하여 택시 회사로 송금하였다. 5시가 넘은 시각임에도, 무르익은 봄의 하늘은 더없이 파랬고, 그 아래 자리한 바다는 작은 물결이 일렁였다. ‘나도 몇 번 그랬는데, 계속 한소리 듣고 그 뒤로는 다시 살펴보게 되더라.’ 같이 온 선생님의 배려 섞인 말씀에 감사하며, 우리는 약속 장소인 식당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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