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주현석 May 18. 2024

일기

주절주절 #11

#일기


제대 후, 꾸준히 써 온 일기가 어느새 일 년 가까이 이어져 오고 있다. 가끔 떠오를 때면 꺼내보는 일기는 그러나, 내 손을 떠난 후엔 마음 편히 끝까지 읽기가 왠지 힘들다. 왜 저런 생각을, 왜 저런 행동을, 왜 저런 표현들을. 같은 내가 맞나 싶을 정도로 과거의 나는 부끄럽고 낯스럽다. 대개는 절반쯤 읽다가 뒤로 가기 버튼을 누르곤 하는 것이다. 돌아보면 읽기 힘든 글들이지만, 그래도 습관처럼 써 온 날들이 해를 넘겨가고 있다는 사실에는 괜한 뿌듯함이 일기도 한다.

일기를 쓰다 보면 좋은 점은, 현재의 순간을 조금 더 예민하게 느낄 수 있다는 것이다. ‘이것도 언젠가 일기의 재료가 될 거야.’ 그런 마음으로 하루를 살다 보면, 뜻밖의 여러 일이나 그 속의 희로애락을 조금 더 명징하게 머릿속에 담아두게 된다. 그렇게 순간에 몰입하다 보면, 쳇바퀴 구르듯 단조로운 삶이라도 그 속에서 뜻하지 않은 장면들을 마주하게 된다. 평범한 일들을 판타지처럼 여기게 되고, 우연한 사건을 운명이라 느끼게 되는 그러한 순간들이 불현듯 찾아오는 경우가 있다. 그럴 때면, 혹시 어떤 소설가가 나라는 인물을 주인공으로 삼아 한 편의 이야기를 써 내려가고 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엉뚱한 상상을 하기도 한다.

그러나, 당연하게도 운명이라 여기는 대부분의 삶은 우연의 영역을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하루는 여느 때와 다름없이 자기 멋대로 흘러가며, 개중 대부분은 기억이라는 유한한 저장 장치 바깥으로 밀려나 소리 없이 사라지게 된다. 정신없는 하루하루를 보낸 후 출근 걱정이 없는 금요일 밤, 여유롭게 지나온 시간들을 복기하다 보면 결국 남게 되는 것은 강렬했던 순간의 편린들뿐인 것이다. 이들을 하나의 서사로 엮어내면, 우연한 흐름들은 어느새 격렬한 파도가 되고 밀려오는 물살은 왠지 운명처럼 느껴지기 마련이다. 편집과 각색이라는 작업을 거친 일련의 삶은 그렇게 일기라는 한 권의 단편으로 탄생하게 된다. 그러한 점에서, 일기는 다소 소설적이다. 나의 삶을 나의 손으로 거쳐 나온 작품이지만, 그 앞에 나는 한 명의 독자가 된다. 무수한 글자들로 조직된 며칠간의 생애 앞에 나는 어떤 낯섦과 더불어, 그러나 일말의 기시감 또한 느끼곤 한다.

주인공의 자격을 잃어버린, 지나왔지만 아득하게만 느껴지는 세계 앞에서, 나는 화면 속 다채로운 하루를 살아가는 인물에게 묻는다. 너는 누구니? 나였지만 내가 아닌, 경험했지만 서로 다른 시간 속에 사는 그의 삶을 바라보며 나는 왜 어떤 감정을 느끼게 되는 걸까. 소설화된 인물의 편집된 삶은, 아득한 거리감이 느껴짐에도 불구하고 극적인 공감을 자아낸다. 그가 느꼈던 고통과 슬픔, 분노와 질투는 화면 속 글자들의 춤사위에서 발현함에도 불구하고, 나의 내부에 있는 어떤 지점에서 발원한 듯한 느낌이 든다. 쿠션감이 있는 등받이 의자 위에 앉아, 카페인이 녹아 있는 커피를 마시며 나는 그의 움직임을 눈으로 훑는다. 여기저기 실수하고 부딪히며, 분노하고 이기적이며 찌질하고 그럼에도 열심히 사는 그에게 나는 묘한 마음이 든다. 그가 부끄럽고 안쓰럽기도 하며, 경멸하다가도 처연함에 동정심이 일기도 한다. 약 일주일가량의 하루 끝에 그의 이야기는 이윽고 마무리된다. 블로그를 나가고, 아이패드의 화면을 끈다. 검은 액정 속에는, 한 명의 독자이자 관객이었던 사람이 있다. 그는 일기의 배우였으며, 소설가였고 영화감독이었으며 그러나 이제는 청중의 자격으로 앉아있다.

시선을 담은 카메라가 허공에 떠올라, 화면을 응시하는 나의 뒷모습을 관조한다. 기억 속 자신을 읽은 그 역시 언젠가는 기억이라는 관념이 되어 편집과 각색을 거쳐 일기라는 유형의 작품이 될 것이다. 그리고, 기록으로 박제된 그를 나는 언젠가 다시 읽어낼 것이다. 그렇게 나는 영원히 일기라는 이야기를 써내는 소설가와 독자 사이를 부지런히 오갈 것이다. 아무리 재미없고 부끄러운 기억이라도, 그 독자가 같은 시간을 지나온 이라면 조금은 마음이 편하지 않을까. 언제나 그랬듯, 이번 주 역시 몇 편의 사진과 함께 일기로 탄생하게 될 것이다. 그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다고 해도 괜찮다. 외로운 소설가에게는, 꾸준히 자기 작품을 읽어주는 한 명의 독자가 늘 있으니 말이다.


23.09.19. 첫 일기 사진



#이방인


작년 말, 교사 커뮤니티에 하나의 글이 올라왔다. 결혼 n년 차라는 작성자는, ‘좋은 배우자를 찾는 방법’이라는 제목 아래 여러 조건들을 나열했다. ‘종교가 있는가.’, ‘주사가 심한가’, ‘담배를 피우는가’, ‘타투가 있는가’ 등등. 이런 조건들을 피한 결과 행복한 결혼 생활을 이어간다는 글 밑에는, 자기도 역시 그렇다는 여러 댓글들이 달려 있었다. 교사라는 직업에 대한 특별한 애정 같은 건 없지만, 그래도 소위 누군가를 가르치는 집단에 속한 사람들이 이런 혐오적 조롱을 일삼는다는 사실에 깊은 분노가 일었다. 댓글 같은 걸 거의 달아볼 일 없는 나로서는 이례적으로 댓글에 혐오적인 행태를 비판하는 글을 실었던 것 같다. 대댓글이 달린 것도 같았지만, 그 뒤로 그 글을 다시 읽지는 않았다. 그러나, 당시의 분노는 얼마간 마음속에 잔향을 일으킨 채 머무르곤 했다.

삶을 살아가다 보면, 참 다양한 유형의 사람들을 마주하게 된다. 술 냄새만 맡아도 진저리치는 사람들이 있는가 하면, 술 없이는 개운한 하루를 보내기 어려워하는 사람들도 있다. 평생 험한 말을 입에 담지 못하는 사람들도 있지만, 위급할 때 자연스레 욕이 튀어나오는 사람들도 있다. 그러나, 다양한 삶의 구성 방식이 사람의 기질과 본성에 관해 모두 말해주는 것은 아니다. 흠잡을 데 없는 모범생으로 커온 사람이 끔찍한 범죄를 저지르기도 하고, 유흥과 쾌락을 탐하는 사람이 따뜻한 마음을 내보이는 경우도 있다. 다양한 삶의 모습은 꼬인 실타래처럼 복잡하게 얽히고설켜있으며, 현상을 파악하고 판단하고자 하는 사람의 욕망은 몇몇 기준 아래 사람들을 유목화하곤 한다. 최근 유행인 MBTI는 이러한 현상의 대표적 사례다. 무수한 삶의 양식을 무려 16가지로 압축할 수 있다니! 너도나도 I 인지 E 인지 묻고 답하는 것은 이상한 일이 아닐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사후적 기준이 진리가 되고, 진리가 가치화되면 그 뒤로는 재판이 벌어진다. 저마다의 기준에 따라 사람들을 구별하고, 소수자나 집단적 사유에 반하는 이들을 악마화하기에 이른다. 악마로 판별된 이들에게 대중은 인권을 박탈한다. 합법적인 멸시와 조롱이 이어지고, 관조하는 주변인들은 자기와 전제된 거리감 속에서 안심하며 마음껏 웃고 즐길 자유를 누린다. 과거 콜로세움에서 묘기를 선보이던 광대들은, 나와 같은 인간이 아닌 것이다. 그렇기에 그들이 넘어지고 부딪히며, 불구덩이 속에 뛰어들어도 관객들은 즐거움을 느낀다. 한껏 야유하고 조롱해도 그 안에 죄책감은 자리하지 않는다.

하지만, 조롱의 위험성은, 조롱의 주체 및 관객들과 대상 모두 같은 생명이자 인간이라는 사실에 있다. 욕망과 감정, 감각을 지닌 인간의 동질성을 조롱은 차단한다. 그저 이상한 사람이라고, 악마라고 매도하면 마음이 편한 것이다. 그 속에는, 나 역시 가지고 있는 소위 악마적 본능에 대한 죄책감을 해소하고픈 욕구가 자리한다. 타인의 모자람으로 나의 고상한 인성을 취하고자 하는 저열한 욕망은, 그렇기에 혐오적이다. 혐오가 만연한 사회에서 어떤 일이 벌어지는지는 지난 몇 년간 뼈저리게 느껴왔다. 응축된 분노는 불시에 터지기 마련이다.

글을 쓰는 동안, 전에 읽었던 카뮈의 <이방인>이 떠올랐다. 그간 <이방인>을 수없이 읽으며, 나는 카뮈의 세계를 체념과 공허, 염세로 읽었다. 그러나, 문득 뫼르소의 행위의 기저에 분노가 있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편견 섞인 인식이 겹겹이 쌓인 세계 속에서 염증을 느낀 카뮈가 뫼르소에게 칼을 쥐여준 게 아닐까. 저열한 시선과 조롱의 순환을 카뮈는 살해하고 싶었던 게 아닐까. 아무래도 조만간 <이방인>을 다시 읽어야 할 것 같다. 과연 뫼르소의 칼끝이 폐부를 찌르게끔 추동했던 것이 무엇이었는지, 재판이라는 양식적 절차에서 기꺼이 죽음을 택한 그의 마음이 무엇이었는지 나는 궁금하다

이전 10화 스승의 날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