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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주현석 May 25. 2024

얼굴

주절주절 #12

#얼굴


22살. 당시 대학교 3학년이던 나는, 종강 기념 과 모임 참석 차 지하철에 오르려는 참이었다. 목적지를 확인한 후, 해당 정거장으로 걸음하려는 순간, 누군가 나의 등을 손으로 가볍게 두드렸다. 놀라서 돌아보니, 머리가 하얗게 센 노인이 a4 사이즈 정도 되는 종이를 눈앞에 들이밀고 있었다. 나는 고개를 숙여 그 글씨를 자세히 바라봤다.

‘상무관’

평일 오후라 그런지 역 내는 비교적 썰렁했고, 나는 낯선 이를 마주함에 있어 가벼운 불안을 느꼈다. 잠시 망설이는 사이, 문득 나의 시야에 노인의 목이 들어왔다.

노인의 목엔 작은 구멍이 나 있었다. 마치, 검지로 두부를 지그시 누른 뒤 생긴 자국과 같은.

나는 다시 노인의 얼굴로 시선을 옮겼다. 노인은 거친 숨을 몰아쉬며 불규칙한 신음을 내었다. 그 음들은, 구멍이 난 목으로 새어 나오는 바람 탓에 미처 언어가 되지 못한 채 공기 중으로 흩어졌다. 노인의 숨소리를 읽어내기 위해서는 그가 손에 든 하얀 종이 위 글씨가 필요했다. 노인은 말하고 있었다. 젊은이, 나를 상무관으로 데려다줄 수 있겠나.

나는 휴대폰을 꺼내 지도 앱을 누르고 상무관을 검색했다. 금남로 4가역에서 상무관은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있었다. 나는 노인에게 말했다. “어르신, 제가 데려다 드릴게요.” 말을 할 수 없는 노인에 대한 어떤 뭉근한 감정에도 불구하고, 여전한 낯섦에 대한 불안감에 나는 그와 약간 거리를 둔 채 앞서 걸으며 상무관으로 향했다. 노인은 종이를 주머니에 넣은 후, 그런 나를 따라 터벅터벅 걸음을 옮겼다.

약 5분 후, 상무관이 모습을 드러냈다. 전일빌딩 옆, 5.18 민주광장 한켠에 자리한 건물은 광주에서 22년 동안 살았던 나도 처음 보는 곳이었다. 건물의 입구 앞엔 정장 차림의 남성이 방문객들을 맞이하고 있었다. 그는 입구로 향하는 나와 노인을 번갈아 쳐다보았다. 노인은 환한 표정과 함께 어느덧 나를 앞서기 시작했고, 정장 차림의 남성은 노인에게 허리를 90도로 숙여 인사를 건넸다.

건물 외벽에는 5.18 희생자 추모식에 관한 플래카드가 걸려 있었다. 노인은 입구로 향하는 걸음을 멈춘 후, 짧은 동행길을 함께한 젊은이에게 몸을 돌렸다. 그러고 나서, 노인은 주머니에서 지갑을 꺼내 안에 담긴 카드를 내게 보여주었다. 카드엔, 노인의 이름과 얼굴이 있었다. 그리고, 그 아래 적힌, 문장은 기억 속에서 흐릿해졌지만 또렷이 기억나는 단어.

‘5.18 유공자’

나는 카드에 적힌 이름과 얼굴, 글귀를 차례대로 읽은 후 고개를 들어 노인을 바라봤다. 노인의 목에는 작은 구멍이 있었다. 그 구멍을 통과한 총알은 노인에게서 말을 앗아갔다. 말을 잃은 노인에게는 찾아야 할 언어들이 있었다. 그 언어들은 역시 총알이 여기저기 박힌 건물들 틈에 자리하고 있었다. 스러져간 죽음들, 말을 잃은 언어들. 30년의 세월은 그들을 사라지게 할 수 없었다. 살아남은 자들이 있었기 때문에. 다시 찾아올 이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나는 노인에게 90도로 허리를 숙여 인사했다. “감사합니다.” 노인은 카드를 지갑에 넣은 후, 가볍게 손을 흔들고 남성의 안내를 받아 상무관 안으로 입장했다. 그들이 떠난 자리에서, 나는 가만히 서서 건물을 바라봤다. ‘5.18 희생자들을 추모하며.’ 산 자들이 죽은 자들을 만나는 그곳에는 공유된 상처가 머물러 있었다. 그리고 그 상처는, 시대를 살아내지 못한 나의 눈앞에도 여전히 현현했다. 봄은 모두의 것이었지만, 그 봄이 모두에게 따뜻함으로 감각되는 것은 아니다. 나는 돌아서며, 노인의 목에 자리한 구멍에 대해 생각했다. 뜨거운 바람이 새어 나오던. 미처 질서를 부여받지 못한 소리들. 그러나, 그 소리들은 그 어떤 언어들보다 슬프게 들렸다. 깊고 어두운 구멍에는 슬픔이 있었다. 고통과 상흔, 죽음과 폭력이 있었다. 그리고, 그럼에도 꿋꿋이 살아남아 그날을 찾아가고야 마는 노인의 굳은 의지가 있었다.



#예술


마크 로스코의 그림을 본다. 경계가 흐릿한 사각형과 단색들. 작품을 처음 마주하면, 거장의 이름값에도 불구하고 왠지 난해한 느낌이 든다. 이게 뭐야. 더러는 아이들이 그린 그림이 더 낫겠다며 조소하는 경우도 있다. 실제로 우리 반 아이들에게 색연필을 쥐여주면 그럴싸한 작품들이 쏟아져 나온다. 초현실주의 작품들에 대한 대중들의 평가가 극으로 나뉘는 일은 비일비재하다. 리얼리즘 작품에서 느껴지는 웅장함과 아름다움이, 여기서는 직관적으로 와닿지 않는 것이다.

예술에 관심을 가지게 된 지는 몇 년 되지 않았다. 대학 시절, 가끔씩 광주에서 하는 전시회를 보러 다녔고, 입대 후 본격적으로 관심을 갖게 되어 휴가를 나오게 되면 서울 내에 있는 전시회를 돌아다니곤 했다. 당시 서울시립미술관에서 개최된 에드워드 호퍼전에 몰린 인파를 보고 깜짝 놀랐던 적이 있다. 나는 큰마음 먹고 온 전시회인데, 여기 사람들은 그저 집 앞에 마실 나오듯 편안하게 보러 오는구나. 지방에 살기에 예술 작품들을 자주 접할 기회가 적었던 나는, 점차 피어나는 갈증을 해결하고자 부지런히 서울을 찾곤 했다. 백남준과 필립 파레노, 김환기와 백영수 등의 작품들도 이때 접하게 되었다.

전시회를 자유롭게 갈 수 없으니, 군대에서는 예술 서적을 탐독했다. 박보나의 에세이를 비롯하여 <방구석 미술관> 등 작품에 대해 쉽게 해설해 놓은 책들. 고흐의 편지를 편집한 책과 구보타 시게코의 전기 등 인물과 작품들에 관한 책들을 미친 듯이 찾았다. 그런 책들에는, 작가의 생애가 비교적 자세하게 서술되어 있었다. 작가들의 파란만장한 삶은, 그들의 작품에 대한 극적인 변화들을 이해하는 계기가 되었다. 로스코의 작품들을 접하게 된 것도 그 당시였다. 가족을 잃고 우울증에 빠진 그의 삶은, 그의 작품이 단순성과 추상성으로 귀결되는 흐름을 이해할 수 있게 하였다.

제대 후, 한 OTT 플랫폼에서 <마리나 아브라모비치가 여기 있다.>(2012)라는 다큐멘터리를 봤다. 행위예술가인 마리나 아브라모비치는 뉴욕 현대미술관에서 대규모 전시회를 개최한다. 관객들은 미로처럼 복잡한 미술관을 통과하며, 그녀가 해왔던 행위 예술 작품들을 목격한다. 나신의 남녀가 마주 보고 있는 문을 통과하면, 역시 나체인 서로의 몸이 고통스럽게 부딪히는 광경을 접하게 된다. 벽에는 성기 주변에 창이 박혀 있는 인물이 나체로 묶여 있고, 미디어에서는 그녀가 스스로를 학대하는 영상이 송출된다. 지난하고 괴로운 작품들을 지나고 나면, 거대한 사각형의 광장 한가운데에 마리나 아브라모비치가 가만히 앉아 있다. 관객들은 그녀 앞에 놓인 의자에 차례로 앉은 채 그녀의 눈을 응시한다. 그렇게 서로를 가만히 바라보고 있으면, 대부분의 관객은 눈물을 흘린다. 슬픔을 못이긴 누군가는 자기 옷을 벗는가 하면, 괴로운 비명을 내지르기도 한다.

다큐멘터리를 보며, 나는 예술의 감상 방식에 대해 생각했다. 관객들이 단순히 마리나 아브라모비치를 마주하게 된다면, 그들은 위와 같은 감정을 느끼기 어려웠을 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들은 그녀를 만나기 위해 그녀가 해왔던 예술 작품들을 경험한다. 서로의 몸을 부딪히고, 자기를 학대하고 스스로를 벽에 묶는 그녀의 예술은, 강박과 애증, 슬픔의 삶을 버텨온 그녀의 고통을 상징한다. 관객들은 그녀의 그런 서사를 이해하고, 또한 느끼게 된다. 그녀가 왜 그런 예술을 해올 수밖에 없었는가를. 그녀의 삶을 감각한 관객들이 비로소 그녀를 마주하게 되면, 그들의 마음속에서는 어떠한 감정이 발원한다. 나 역시, 지난한 삶에서 미처 놓치고 있던 감정의 잔향들. 슬프고 고통스러웠던 순간의 감각들. 그렇게 각각의 삶은 고통이라는 매개로 연결된다. 주체와 객체였던 이들이 하나가 되어 예술이라는 테두리 속에 자리하게 되는 것이다. 예술은 작가의 서사에 대한 이해와, 이를 감각함으로써 발원하는 스스로의 감정을 통해 완성된다. 이는 한없이 개인적인 예술이, 보편적인 감정을 향유하게끔 할 수 있는 이유다.

로스코의 그림을 다시 바라본다. 무질서한 사각형의 흐릿한 경계에서 나는 이성을 붙잡고 싶은, 그러나 그러기엔 너무나 고통스러운 삶을 살아내는 작가의 정신을 본다. 우중충한 단색에서 그의 하늘을 에워싸는 불안과 슬픔의 해무를 본다. 고통을 예술로 승화하던 그는, 그러나 끝내 뉴욕의 작업실에서 자살로 생을 마감한다. 죽음으로 무질서를 완성한 그의 삶은 그렇기에 처연하다. 나는 작품에서 그의 삶을 읽어낸다. 그리고, 내가 지나온 시간 속에 존재하던 고통의 감각들을 떠올린다. 뚜렷한 사각형이 되지 못한, 밝은 색감이 되지 못한 슬픔의 상흔들. 그는 죽음이 되었지만, 그의 작품들은 여전히 삶을 감각한다. 언젠가 삶이 고통스러울 때면, 그의 작품을 직접 보고 싶다. 그 무질서함 속에서도 살아내고자 했던 그의 선들을 느끼고 싶다.


Untitled(1952), Mark Rothko. 출처 : 위키피디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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