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주현석 Jun 15. 2024

취향

주절주절 #15

#취향


언젠가, 한 친구가 내게 했던 말이 있다.

“너는 취향이 너무 확고한 사람이야.”

당시, 저 말을 듣고 나는 적잖이 충격을 받았다. 나는 그동안, 내가 취향이 옅은 사람이라 여기곤 했다. 깊이보다 넓이에 신경이 가 있던 나는, 주변 사람들과 대화할 때 보다 편안한 마음으로 임하곤 했다. 예를 들어, 대화 도중 음악 이야기가 나왔다고 치자.

나는 묻는다. “너는 무슨 음악 좋아해?”

다양한 답변이 나올 것이다. 인디 음악, 락, 힙합, k-pop, 클래식, 재즈 등.. 나는 예상 가능한 답변에 대해, 그간 내가 접해왔던 다양한 데이터들을 정렬한다.

“나는 옛날 k-pop이 좋더라!”

좋다. 그럼, 대중음악에 관한 데이터를 찾는다. 과거 열심히 보고 듣던 몇몇 가수들, 댄스 동아리를 하며 접했던 음악들을 몇 가지로 정리한다. 이후, 상대방에게 한 두 가지를 흘리는 것이다.

“오, 나도 전에 문득 비스트 음악에 꽂혀서 한동안 들었어!”

물꼬가 터지면, 이후 대화는 자연스레 흐르게 된다. 물론, 나의 지식은 상대적으로 얕을 것이다. 하지만, 무지의 영역은 상대의 말들이 부지런히 채워갈 것이다. 나의 역할은 질문과 반응인 것이다. 대개 사람들의 취향은 어느 정도의 폭을 지니고 있기에, 나는 그 모든 폭들에 적당히 가닿기만 하면 될 거라 여겼다. 20대 초반까지 나의 대화의 기술은 취향의 넓이에 기인하였기에, 당시 취향이 확고하다는 친구의 발언은 꽤나 당황스러웠던 것이다. 나는 한동안 저 말을 곱씹었다. 나의 취향은 무엇인가, 나도 확실한 취향이 있는 사람이었나. 그런데, 취향이라는 게 뭘까.

프랑수아즈 사강의 소설 <브람스를 좋아하세요..>의 제목은 특이하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저 소설의 제목을 <브람스를 좋아하세요?>로 알고 있다. 아마, 문장 자체가 질문의 형식을 띄기 때문일 것이다. 소설의 제목이 차용된 국내 드라마 역시 문장 끝에 물음표를 붙여 제목으로 활용하곤 했다. 작가인 사강은, 그러나 저 소설의 제목은 필연적으로 <..>로 끝나야 함을 강조했다. 왜 하필 저 제목은, 깔끔한 물음표가 아닌 뭔가 찝찝한 뒷맛을 남기는 점들로 끝나야만 하는가.

작중 폴은 로제라는 늙은 연인과 함께 살아간다. 그러나, 그녀는 연인에게서 어떠한 만족감을 느끼지 못한 채 그저 맹목적인 관계를 이어갈 뿐이다. 그러한 그녀의 앞에, 시몽이라는 젊은 남성이 나타난다. 그는 그녀에게 묻는다. “혹시, 브람스를 좋아하세요?” ‘좋아하다’ 브람스라는 음악적 취향에 대한 질문 앞에, 폴은 선뜻 답하지 못한다. 그녀는 그의 질문을 되뇐다. “브람스를 좋아하세요..”

취향이란 무엇인가. 취향은 투자의 영역이다. 대상에 대해 사람들은 시간과 돈을 투자한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투자재는 기대 효용을 충족해야 하지만, 취향이 가치재와 구별되는 지점은 그 무용성에 있다. 취향은 개인의 생존과 직결되지 않는다. 좋은 음악을 듣는다고, 소설을 읽는다고 나의 삶이 나아지지 않는 것이다. 그러나, 그럼에도 사람들은 부지런히 그들을 좇는다. 이러한 투자를 추동하는 것은, 개인의 감정이자 욕망이다. 무언가에 깊이 빠져 본 사람들은, 대상의 존재에 반응하는 자신의 감정적 파동을 느끼게 된다. 이들에게 더 이상 효용은 생존의 영역 안에 머무르지 않는다. 취향은 개인이 할 수 있는 가장 주체적인 투자이며, 이는 자신에 대한 명징한 이해를 동반하게 된다.

폴은 ‘취향’에 관한 질문을 맞닥뜨리고, 자신의 취향에 대해 사색한다. 이는 곧, 자신의 주체성에 대해 처음 자각하게 되는 순간이다. 한평생 삶을 주체적으로 구성하지 못했던 그녀의 이러한 인식은 곧 소설의 주제와 직결된다. 사강이 한사코 제목을 강조했던 이유는 여기에 있다. 주제를 집약적으로 드러내는 소설의 제목은 시몽의 질문이 되어서는 안 된다. 폴이 자신의 존재를 돌아보며 되뇌는 순간이 되어야 하는 것이다.

그자비에 드 메스트르는 저서 <내 방을 여행하는 법>에서, 가택구금 동안 자신의 방 안을 천천히 돌아보며 자신에 대해 돌아보는 순간들을 펼쳐낸다. 나 역시 나의 방을 돌아봤다. 스피커와 연결된 턴테이블과 CD 플레이어에서는 각각 검정치마, 언니네 이발관과 영화 OST, 재즈 등이 놓여 있다. 빔 프로젝터에서는 자무쉬의 영화가 송출되고 있으며, 그 옆에는 김영하, 이청준, 헤르만 헤세와 이디스 워튼의 책들이 쌓여 있다. 나도 모르는 사이 나의 취향은 방 안을 가득 메우고 있었고, 언젠가부터 나는 나와 취향을 교류할 수 있는 사람들을 찾게 되었다. 취향의 확고함을 고루함으로 여겼던 20대 초반의 나는 이를 쉽사리 받아들이기 어려워했다. 그러나, 그러한 순간에도 나는 나라는 사람의 퍼즐 조각을 부지런히 맞추고 있었을 것이다. 짓고 부수기를 반복하며 쌓아 올린 지금의 나와 내 방은, 아마 한동안은 무너지지 않을 것 같다. 그렇게 나는 취향이 확고한 사람이 되었고, 이제는 그 사실을 자연스레 받아들이려고 한다.



#피노키오


이번 주 카페에서 진행하는 영화 모임의 선정작은 <기예르모 델 토로의 피노키오>(2022)이다. 영화를 보기 전, 문득 감독이 왜 하필 ‘피노키오’라는 소재를 이용했을까 생각해 봤다. 피노키오란 누구인가. 동화를 거의 읽지 않았던 나는, 피노키오가 거짓말을 하면 코가 커지도록 설계된 인형이라는 것 정도만 알고 있다. 어렸을 땐, 거짓말을 하면 안 된다 정도로 동화의 주제를 이해했던 것 같다. 아마 저 이야기를 듣고 한동안 거짓말을 할 땐 코를 만지곤 했던 것도 같다.

자크 라캉은 저서 <무의식으로부터의 초대>에서 거짓말을 오히려 무의식 속으로 침잠하는 존재의 진리를 드러내는 도구라 말한다. 이를테면 이런 것이다. 선생님께 혼나기 싫은 아이는, 자기가 욕을 하지 않았다고 거짓말을 하게 된다. 이때, 아이는 ‘혼나기 싫다’는 자신의 욕망을 인식하게 되고, 이를 ‘거짓말’이라는 수단을 통해 실현하고자 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아이가 거짓말을 하고 있다는 사실만 파악하면 되레 아이의 욕망을 알 수 있게 된다. 거짓말은, 역설적으로 솔직한 욕망의 실마리로 기능한다.

그렇다면, 피노키오의 저주는 단순히 거짓말의 드러남이 아니다. 피노키오는 자신의 욕망을 숨길 수 없다. 물질적 변화(코의 길이)로 드러나게 되는 피노키오의 욕망은 곧이어 모든 이들에게 알려지게 된다. 피노키오는 내면을 숨길 자유를 박탈당한다. 그렇기에, 피노키오의 욕망 자체가 그의 판단 준거가 된다. ‘속에 그런 음험한 생각을 품고 있었다니, 악마가 따로 없구나!’ 피노키오에게는 본능 자체를 고쳐먹으라는 요구가 주입되는 것이다.

과거 유교적 규범과 전통 역시 이러한 피노키오적 인식을 공유한다. ‘성선설’과 ‘성악설’은, 인간 내면에 대한 가치 판단을 통해 ‘행위’가 아닌 ‘본성’ 자체를 통제하려 들었다. 법제화된 사회적 질서는 행위에 대한 책임만을 묻지만, 개인과 대중, 여론의 심판은 여전히 행위의 이면에 존재한다 여기는 개인의 사유와 본능 자체를 단죄하려 한다. 중세 시대에 자행된 마녀사냥은 ‘마녀적 본성’에 대한 심판이었고, 전쟁과 독재 시기에 행해진 ‘사상 검증’ 역시 이러한 사고에서 기인하였다. 인터넷 댓글과 여론 역시 이와 크게 다르지 않다. 우리는 여전히 서로의 생각과 욕망까지 온전히 알고, 판단할 수 있다고 여긴다. 각자는 서로에게 피노키오인 것이다. 커진 코를 보며, 우리는 그를 벌할 이유를 찾는다.

최근, 한 초등학교에서 발생한 교권 침해가 담긴 영상이 온라인상에 퍼졌다. 유튜버 렉카들의 가해자 신상 털이 역시 꾸준히 이슈화되고 있다. 법의 영역이었던 판단과 단죄가, 여론의 영역으로 점차 넘어오게 되는 것 같다. 이는 기존의 규범적 체계에 대한 불만과 더불어, 개인과 집단이 올바른 정의를 구가할 수 있다는 믿음에서 기인한다. 물론, 그러한 정의는 대개 사이다적 처분에 있다. 일련의 현상들을 보며, 나는 사회를 지탱하던 어떤 신뢰의 기반이 흔들리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양식적 법과 제도가 부조리를 통제하는 데에는 한계가 있다. 빈틈을 메우던 신뢰가 무너지자, 대중은 그 자리를 파고 들어가 직접 창을 꽂기로 결심한다. 교감의 뺨을 때리는 아이와, 그러한 아이를 앵글에 담는 카메라. 이 아이러니한 부조리에서 나는 어떤 비극적 딜레마를 느꼈다.

개인의 욕망을 온전히 알기란 불가능하다. 드러난 거짓말은 그 기저에 놓인 이유를 알 수 있게끔 하지만, 이 또한 공들여 바라보며 이해하는 과정을 거쳐야 한다. 그러나, 현대사회에서 시간은 사치품이 되어버렸고, 각자는 서로의 입과 눈을 자세히 바라볼 여유를 갖지 못한다. 단지, 커져버린 코를 보며 상대를 빠르게 판단하고 눈앞에서 치우기 급급하다. 이를 순전히 개인의 잘못이라 할 수 있을까. 여유가 사라져버린 사회에서, 문득 나는 전에 정부에서 제시한 학교폭력 예방 대책 표어였던 ‘멈춰!’를 떠올린다. 당시, 예산이 저렇게도 창의적으로 낭비되는구나 하는 비아냥 섞인 비웃음만 들었지만, 그 두 글자는 왠지 한동안 내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다. 어쩌면, 우리에게 필요한 건 잠시 멈춰 서는 게 아닐까 싶다. 솔직한 마음을 털어놓는 피노키오의 코는 다시 줄어들게 된다. 우리의 역할은, 피노키오가 원래 크기의 코를 갖도록 마음을 돌려놓는 게 아닐까.


<기예르모 델 토로의 피노키오>(2022), 출처 : 넷플릭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