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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주현석 Jun 22. 2024

주절주절 #16

#춤


대학 시절, 3년 동안 춤 동아리 활동을 했다. 첫 시작은, 추가 모집원을 탐색하던 과 선배의 권유로 인해서였다. 당시 적당히 권태로워진 학교생활과 입시에 대한 미련 사이 반수를 고민하던 나는, 춤 동아리라는 생각지 못했던 선택지에 흥미를 느꼈다. 그래. 지금껏 죽어라 입시에만 매달렸는데, 이젠 조금 색다른 걸 해 보자. 과 선배에게 밥을 얻어먹고 난 후, 나는 미련 없이 반수를 포기하고 춤 동아리 환영회 모임에 참석했다.

그간 춤 비슷한 걸 춰본 적이 없던 나로서는, 신입생 공연곡에 포함된 웨이브 동작을 맞닥뜨리고 첫 부침을 겪었다. 아무리 상체를 움직이고 가슴을 내밀어 봐도, 다른 동기들처럼 자연스러운 웨이브 동작으로 연결되지 않았다. 뻣뻣한 몸으로 엉성하게 동작을 맞춰가는 내게, 팀장이던 과 동기는 친절한 설명을 곁들여 자세를 바로잡아줬다. ‘자, 가슴을 내민 상태에서, 음식을 삼키는 것처럼 배로 힘을 내려봐.’ 나는 거대한 음식을 삼키는 상상을 하며 거울 앞에 서서 온종일 가슴과 배를 꿀렁였다. 그렇게 몇 달간 꾸준히 연습한 결과, 만족스럽다고 할 순 없지만 그래도 웨이브 비스무리한 어떤 자세가 잡히기 시작했다. 첫 공연 무대는 학교 축제였고, 나비넥타이를 어색하게 맨 나는, 다행히 적당히 팀 안에 묻어들며 공연을 마칠 수 있었다.

타고난 재능이야 이길 수 없지만, 취미의 영역은 시간과 노력으로 어느 정도 숙련될 수 있는 걸까. 3년 동안 빠짐없이 동아리 활동을 하며, 나는 제법 춤이 몸에 익기 시작했다. 설명을 듣고 동작을 연습하며, 나는 점차 근육과 힘의 움직임을 느끼기 시작했다. 약 5분 내외의 춤은 분절된 동작의 결합이 아닌, 연계된 일련의 행위의 총체였다. 춤 동작을 하는 5분 내내 힘을 극한으로 주거나 빼서는 안 됐다. 마치 롤러코스터를 타듯, 근육의 수축과 이완이 자연스레 연결될 때 동작은 한결 자연스러워졌다. 그리고, 그러한 힘의 제어는 결국 스스로가 느끼는 수밖에 없었다. 물론, 춤에 익숙지 않은 사람이 이를 처음부터 느끼는 것은 무리였다. 그렇기에, 전문적 설명과 지도가 필요했던 것이다. 언어화된 지시와 설명을 통해 내면의 느낌을 자각하는 것. 춤이라는 비정형의 흐름으로 향하는 길목에는 언어와 감각의 매개가 자리했다.

대학 졸업 후, 그간 소홀했던 영화를 다시금 꾸준히 보기 시작했다. 다양한 영화를 보고 취향을 형성해 가며 알아간다는 것에 대해 재미를 느끼던 때가 있었다. 영화가 끝나면 해석과 비평부터 찾아보고, 영화적 기법과 감독의 의도를 확인하는 과정 속에서 영화를 온전히 볼 수 있다는 생각을 했다. 하지만, 세상에 존재하는 수많은 해석과 무수한 기법들을 마주하며, 나는 점차 영화 감상을 관성적인 일로 여기기 시작했다. 부러 어려운 영화를 찾고, 영화가 끝나면 평론가의 별점부터 확인하고, 해석과 감독의 인터뷰를 검색하고.. 어느 날엔가, 여느 때처럼 PTA의 작품을 해부한 후 이 정도면 충분하다는 생각에 아이패드 화면을 껐을 때, 그러나 왠지 모를 아쉬움이 남았다. 그래서, 나는 대체 이 작품을 왜 본 것인가. 이 작품을 통해 내게 남은 건 무엇이었나.

올해 초, 조현철 감독의 <너와 나>(2023)를 보고 난 후, 잔뜩 신이 난 채 친구와 한참을 이야기하며 집으로 걸었다. 미처 가시지 못한 감동을 곱씹으며 걸음을 옮기던 중, 문득 그간 내가 당연한 걸 놓치고 있던 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왜 책을 읽고 영화를 봤던가. 좋은 문장, 글을 발견했을 때, 진득한 이야기를 마주했을 때의 감동과 잔향에서 시작된 게 아니었나. 해석과 비평은 내가 느꼈던 감정들을 언어화하여 보여준다는 점에서 보다 깊이 감동할 수 있게 하였다. 하지만, 어느 순간 나는 그러한 언어적 매개 자체에 매달리고 있었다. 행위가 인식과 이해에 그칠 때, 일련의 탐색은 지난한 고행으로 자리한다. 예술을 탐하고 삶을 살아내는 원동력은 감정이기에, 나는 차츰 ‘공부’에게서 조금 거리를 두기 시작했다. 책을 덮고 영화관을 나설 때면, 나는 잠시 휴대폰을 주머니에 넣은 채 거리를 걸었다. ‘그래서, 이 영화의 끝에 네게 남은 것은 무엇이었나.’ 나는 내 안에서 생긴 여러 감정들의 메아리를 열심히 들었다. 나는 무엇을 느꼈나. 약 두 시간 동안의 춤의 끝에는 무엇이 남았나. 언어적 해석은, 그러한 감정의 잔여물을 확인하는 과정이었다.

흔히 ‘아는 만큼 보인다.’라고 한다. 물론, 이는 맞는 말이다. 아는 만큼 보이며, 보이는 만큼 감각할 수 있다. 하지만, 보는 것만큼이나 내면의 감정을 듣는 것 또한 중요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되는 요즘이다. 결국 예술은 감상자의 주체적 감흥에서 완성되기에. 여전히 읽을 책들과 볼 영화들은 산더미처럼 쌓여 있다. 개중에는 이전에 보았던, 알았던 작품들도 있다. 평화로운 주말의 오전, 나는 귀를 쫑긋 세우며 열심히 이들을 읽어내고 감상한다. 두 눈이 부지런히 글자와 장면들을 훑는 동안, 달아오른 귀는 내 안에서 시시각각 변하는 어떤 감정의 목소리를 듣고자 한껏 예민해진다. 열심히 춤을 연습하던 20살의 여름, 웨이브를 성공하며 몸의 감각을 생경하게 느꼈을 때의 희열을 나는 다시금 감각하고자 한다.




#영화


그럼에도, 어떤 영화는 봐야만 하는 경우가 있다. 이 영화가 내겐 그러했다.

2014년 영국 아카데미 영화상(BAFTA) 다큐멘터리 수상작 <액트 오브 킬링>은, 안와르 콩고라는 인도네시아 출신의 인물에 대해 다룬다. 그는, 과거 쿠데타 당시 반공 색출이라는 명목하에 수많은 시민들을 살해한 주범이다. 그와 그의 패거리는, 과거의 역사를 재현한다는 명목 아래 자신들의 살상을 연기하기 시작한다. 피가 너무 많이 튀긴다며 와이어로 시민을 살해하는 행위를 유쾌하게 연기하는가 하면, 10대 소녀를 강간했던 사실을 농담조로 이야기하곤 한다. 영화 말미에 이르러 자신의 연기와 학살의 부조리성을 느끼고 구토를 하는 장면이 등장하긴 하지만, 이들의 행적을 보다 보면 인간의 악마성에 대해 고민하게 된다. 그와 같은 살과 뼈로 이루어진 나는, 인간이라는 존재는 정녕 잔혹한 악과 공존하는가. 한나 아렌트의 ‘악의 평범성’ 역시 이 영화 앞에서 자신 있게 수긍하기가 어려워진다. 우리는 대체 어디에서 왔는가. 피부로 에워싸인 우리의 안에는 대체 무엇이 자리하는가.

악이라는 존재에 대한 탐구는 내 오랜 관심 속에 자리했다. 여러 작품들을 마주했지만, 이 영화만큼 뇌리에 강하게 스며드는 것은 없었다. 그 어떤 해석과 판단도 이 작품 속 악마들 앞에서는 차마 날개를 펴지 못했다. 그리고, 가장 서늘하게 다가오는 것은, 화면 속 그들이 우리와 같은 인간이라는 사실이었다.

최근 <존 오브 인터레스트>(2024)가 개봉했다. 홀로코스트 사태와 악의 평범성에 대해 다루었다는 이 영화는, 다수의 찬사와 함께 반향을 일으키는 중이다. 고민하던 나는, 결국 주말 오후 시간대에 극장에 걸린 이 영화를 예매했다. 인간과 악은 여전히 나의 관심사이며, 나는 이들을 그려낸 작품들을 부지런히 뒤쫓는다. 진실은 흐릿하다. 하지만, 사실은 그 자리에 존재한다. 존재를 알아버렸기에, 나는 차마 그들로부터 눈을 돌리지 못한다. 악은 그 시대와 그곳에 틀림없이 있었고, 시공간을 초월한 영화라는 안경을 통해 나는 기꺼이 그들을 바라보고자 한다.



액트 오브 킬링(2014), 출처 : (주)엣나인필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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