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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주현석 Jun 29. 2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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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절주절 #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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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학기가 서서히 후반부에 접어들고 있다. 여름 방학이 한 달 남짓한 이 기간은, 교사들에게는 퍽 바쁜 시기다. 출결을 정리하고, 성적 및 종합 발달 사항을 입력하는 등 온갖 서류 및 정보 입력에 여념이 없는 것이다. 정신없이 업무를 처리하다 보면, 어느새 교탁 주변을 빙 둘러싼 아이들은 키보드를 매섭게 두드리는 나를 신기한 듯 쳐다보며 각자 한 마디씩 건네곤 한다. “선생님, 피아노 쳐요?”, “선생님, 저 주말에 뭐 했게요?” 바쁜 업무에도 불구하고, 아이들이 건네는 말이 공중으로 휘발되지 않도록 두 귀는 항상 열어두고 있어야 한다. 매번 정성스럽게 답해주지 못해 미안함을 느끼지만, 그래도 이렇게 단편적으로 듣는 말들에서 아이들에 관한 정보의 조각들을 얻곤 하기에 꼭 한 두 마디씩 반응을 건넨다. 담임은 정말 바쁜 역할이구나. 작년 여름, 제대 후 교과 전담 교사로 복직하며 어렴풋이 생각만 했던 이 자리가 새삼 무겁게 느껴진다.

제대 직후, 짧은 머리를 어색하게 매만지며 들어선 교실은 과학실이었다. 작년 2학기에 나의 전담 과목은 ‘과학’과 ‘안전한 생활’이었다. 1~2학년 교과인 ‘안전한 생활’은 과거 ‘바른 생활’ 정도의 위치라고 보면 좋을 것 같다. 교과 내용을 별게 없다. 차시마다 한 장짜리로 이루어진 교과서는 온통 그림으로 도배되어 있고, 이 무책임한 교과서 덕에 교과 활동은 자료 수집과 쥐어짠 창의력을 결합한 놀이가 주를 이루곤 했다. 당시 2학년이던 지금 우리 반 아이들은 매주 1시간 수업을 나와 진행했다. 대부분의 활동은 놀이였고, 그마저도 한 주에 한 번밖에 보지 못하는 사이였기에 서로에게 있어 큰 기억은 남지 않았던 것 같다. 당시 나는 끝내 1, 2학년 아이들의 이름은 전부 외우지 못했다.

해가 바뀌고 새로운 학년을 배정받고 나서 교실로 들어간 첫날, 미리 등교하여 자리에 앉은 아이들과 마주한 나는 왠지 모를 낯섦을 느꼈다. 분명 내가 가르쳤던 아이들이지만, 고학년과 달리 데면데면한 관계였기에 쉽게 분위기를 풀어내지 못했다. 차라리 처음 본 사이였다면 조금 더 확실한 스탠스를 취하지 않았을까. 이 어색함을 푸는 데에는, 내 딴에서는 조금 시간이 걸렸던 것 같다. 3월 한 달 동안 우리 반은 교과 진도를 거의 나가지 않았다. 흔히 ‘아이스브레이킹’이라 불리는 관계 형성 활동을 지속하며, 나는 최대한 아이들과 가까워지고자 했다.

짧은 머리는 어느새 이전의 더벅머리로 돌아왔고, 날은 다시금 더워져 여름을 맞이하게 되었다. 아이들은 초봄의 어색함은 안중에도 없다는 듯 마치 놀이 기구 마냥 선생님에게 매달리기 바쁘고, 나는 이제 아이의 표정만 봐도 무슨 일이 있었는지 대강 때려맞힐 수 있게 되었다. 가끔 수업을 하는 도중, 작년 안전한 생활과 관련된 이야기가 나오면 왠지 어색한 느낌이 든다. 분명 작년에도 만났던 아이들인데, 작년의 이들과 올해 내 앞의 아이들은 왠지 다른 사람인 것만 같다. 아이들 각각에 대해 깊이 바라보고 쌓아온 정은 서로의 존재를 다르게 감각하게끔 한다. 대면적 관계에서, 중요한 것은 존재 자체가 아니었다. 상대를 가까이에서 오랫동안 바라보고 감각하며 이해하는가. 서로를 특별하게 만드는 것은 시간과 노력이었다.

봉준호 감독의 영화 <옥자>(2017)는 산골 소녀 ‘미자’와 그녀가 키우는 슈퍼 돼지 ‘옥자’에 관한 이야기를 다룬다. 거대 기업 ‘미란도’에 의해 끌려간 옥자를 구하기 위해 미자는 산과 바다, 나라와 나라 사이를 종횡무진하며 돌아다닌다. 비윤리적 도축 방식과 유전자 변형을 통해 변종 육류를 생산해 내는 기업의 총수와 맞닥뜨린 미자가 옥자를 구하기 위해 선택한 방법은, 바로 그들이 속한 자본주의였다. 황금 돼지 기념품을 건넨 미자는 자신의 ‘옥자’를 요구하며, 총수는 이 거래를 받아들인다. 공장 내 수많은 돼지와 같은 모습을 한 채 구별되지 않는 ‘옥자’는, 그에게 이름을 부여한 미자의 품으로 다시 돌아오게 된다. 공장식 도축의 잔인함과 자본주의의 생명 경시적 행태, 인간의 욕망과 이기심을 훑기는 하지만, 영화의 서사는 ‘옥자’ 한 마리를 구하는 것으로 귀결된다. 그깟 돼지 한 마리를 구하고자 온갖 역경을 뚫고 지나가는 아이를 어른들은 이해하지 못한다. 그러나, 미자에게 있어 옥자는 도축 예정인 돼지 한 마리가 아니다. 아이에게 옥자는 친구이자 가족이다. 서로가 주고받은 시간과 노력은, 단지 몇몇 특징으로 기술된 분류를 넘어 서로를 유일한 존재로 감각하게끔 하는 것이다.

이제는 서로가 서로를 쉽게 바라볼 수 있다. SNS의 발달은 시공간적 제약을 해결하여, 누구나 서로의 모습과 일상을 보게끔 지원한다. 하지만, SNS는 바라봄에 있어 시간과 노력을 전제하게끔 유도하지 않는다. 인스타그램 스토리는 10초~1분 내외 동안 지속된 후 넘어간다. 게시물은 새로고침 한 번이면 저 밑으로 내려가며, 사람들은 제한된 글자 수와 사진 몇 장으로 자신을 드러내고 상대를 읽어낸다. 짧은 시간과 간단한 노력은, 서로의 존재 자체를 감각하는 데 그칠 뿐이다. 그렇기에, 인터넷상의 댓글은 항상 쓰레기장을 방불케 한다. 의미 없는 내용과 단순한 비난, 비아냥과 감정의 배설에 그치는 생각의 교류가 현대 지성의 발명품인 네트워크의 현실이다. 모두가 넓게 볼 수 있지만, 자세히 보기는 어려워진 세상에서 존재는 단순한 정보로 치부되어버린다.

언젠가부터 나는 나의 그릇을 인식하게 되었다. 아, 나는 모든 사람들의 사정과 상황을 담아낼 만큼의 그릇은 되지 못하는구나. 곧이어 나는 나의 시선을 주변으로 한정하기 시작했다. 가족과 친구, 내가 가르치는 아이들과 근무하는 동료들. 얼굴을 마주하고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들이는 시간과 노력만으로도 나의 역량은 모자란 수준이었다. 저 먼 곳에 있는 이들의 여러 사건사고들을 모두 파악하고 판단하기에는 이야기도, 시간도 한참 부족했다. 인터넷상에 떠도는 사건들에 대해 나는 판단 내리기를 멈췄다. 시간은 한정적이고, 모든 노력을 쏟아붓기에 나의 힘은 한계가 있으니. 교탁으로 몰려드는 아이들의 이야기를 듣는 게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인 것이다.

최근 봤던 조나단 글레이저 감독의 <존 오브 인터레스트>(2024)가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는다. 유대인 점멸 계획일 실행하던 루돌프 회스와 아우슈비츠. 나치 치하의 독일과 홀로코스트. 단순히 2시간 동안의 영화적 체험으로 끝내기엔, 존재했던 악과 비극을 충분히 이해하기 어려웠다. 영화 감상 후, 도서관과 서점에서 나는 관련 책들을 부지런히 모았다. 지금 내 앞에 있는 볼프강 벤츠의 <홀로코스트>에는 유대인들의 목덜미를 사격하여 살인했던 이들의 인터뷰가 실려 있다. 왼편에 놓인 프레모 레비의 <이것이 인간인가>는 작가가 아우슈비츠에서 지냈던 이야기를 다루고 있으며, 유제프 차프스키의 <무너지지 않기 위하여>는 포로수용소에서 마르셀 프루스트 문학을 강의하며 정신을 다잡던 작가의 삶을 써낸 책이다. 실존했던 비극과 목격된 악에 대해서 인간은 무엇을 할 수 있는가. 나는 이들을 부지런히 읽고 또 읽는다. 사건은 존재했고, 존재를 특별하게 만드는 것은 시간과 노력이기에. 현현하는 악을 감각하고 인간을 이해하고자 나는 글자들을 부지런히 따라간다. 그 안에는 여전히 비명과 학살, 고통과 살인이 자행되고 있다. 그리고, 이들을 읽어내기 위해서는 보다 지난한 시간과 노력이 필요할 것만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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