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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주현석 Jul 06. 2024

분류

주절주절 #18

#분류


전에 교무실에서 1학년 선생님과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눈 적이 있다. 작년에 ‘안전한 생활’ 교과를 수업하느라 저학년 아이들을 잘 알고 있기에, 대화 주제는 자연스레 1학년 아이들로 옮겨졌다. 한창 대화를 나누던 도중, 문득 궁금한 점이 생겨 선생님께 질문을 드렸다.

“저, 그런데 아이들도 저마다 본래적인 성격이라는 게 있을까요?”

“성격은 후천적으로 변할 수도 있는데, 기질은 본래적으로 다들 가지고 있는 것 같아요.”

아, 듣고 보니 정말 어린아이들임에도 불구하고 저마다의 개성과 특징이 너무나 뚜렷하다. 조금만 목소리가 커져도 눈물을 쏟는 아이들이 있는가 하면, 아무리 타이르고 혼을 내도 언제 그랬냐는 듯 통통 튀며 교실을 누비는 아이들도 있다. 쉬는 시간에는 이러한 특징들이 가장 뚜렷해진다. 혼자 책을 읽는 아이 옆에서 몇몇 아이들은 신나게 춤을 춘다. 교실 뒤편에서는 술래잡기를 하며 서로 몸을 부딪히기 바쁜 아이들이 와글거리고, 선생님 곁에서 이런저런 질문을 건네는 아이들도 있다. 두 손가락으로 표현 가능한 나이임에도 저마다 특색이 다 다른 아이들을 보고 있노라면, 정말 선천적인 기질이라는 게 존재하는구나 하는 걸 느끼게 된다. 덕분에 교실은 지루할 틈이 없고, 사건사고는 언제든 일어날 수 있기에 근무 중에는 항상 촉각을 곤두서게 된다.

서로 간의 차이를 구별하는 기준은 선천적인 기질과 외양에서 시작하여 아이가 성장해 감에 따라 점차 다양해진다. 출생지와 언어, 성별과 학교, 직업과 정치적 견해 등등. 다양한 생각, 성격과 외모를 사람들은 사회적으로 산재하는 틀 속에 대입하여 분류한다. 그 과정에서 나와 비슷한 사람들에 대한 소속감이 형성된다. 사람은 자고로 사회적 동물이 아닌가. 물론, 이와 반대로 나와 다른 이들에 대해서 가지는 적개심 또한 스멀스멀 올라온다. 그렇게 가지각색으로 분류된 자들이 저마다의 무리를 이루고, 그 과정에서 협동과 갈등이 동시에 발생한다. 소속 욕구와 낯섦에 대한 적의 모두를 포용하는 분류라는 도구는, 그러한 점에서 삶과는 불가분한 관계인 것만 같다. 이원적인 인간의 본성을 분류는 전부 만족시키는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성향은 아이와 노인을 가리지 않고 곳곳에서 표출된다.

룰루 밀러의 <물고기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이러한 분류가 가지는 커다란 난점을 심도 있게 풀어낸다. 분류학의 대가였던 데이비드 스타 조던의 삶을 선망하던 저자는, 그러나 그 이면에 자리한 ‘분류’의 비극적 결과를 목격하게 된다. 틀을 정립하고 난잡한 개체들을 하나로 묶어주는 유용한 도구였던 분류는, 그러나 인간을 주관적 기준으로 세분화하고 우열을 나누게끔 하는 흉기로 오용된다. 그 과정에서 우생학이 탄생하고, 홀로코스트를 비롯한 수많은 학살과 참사가 이어진다. 악이 심판되고, 무수한 성찰과 진보가 이루어진 현대 사회에도 분류의 비극은 여전히 진행형이다. 다원화된 사회는 보다 세밀한 기준으로 서로를 나누고 갈등을 일으킨다. 성별, 정치색, 종교, 취향, 문화 등 수많은 잣대가 개인들을 나누어댄다. 온라인 댓글은 투기장을 방불케 하고, 혐오는 이미 보편적인 단어가 된 지 오래다.

그러나, 그럼에도 분류는 여전히 곳곳에서 즐겨 사용되고 있다. 과거 혈액형으로 나누던 개인의 성격과 특징을 이제는 MBTI가 대신하고 있다. 너 나 할 것 없이 I 인지 E 인지 확인하기에 여념이 없으며, 소개팅과 같은 첫 만남에서도 MBTI의 확인은 필수가 되어버렸다. 이러한 흐름은 교육 현장에서도 이어진다. MBTI 검사를 도입한 학생들의 성격 파악이 지속적으로 이루어지며, 이에 따라 저마다의 기질과 성격을 확인하고 분류하는 과정이 진행된다. 아이들은 자신과 상대의 언어화된 성격을 통해 서로를 조금 더 이해하며 접근하게 된다. ‘아, 너는 J라서 계획적이니까, 모둠에서 팀장을 맡는 게 어때?’ 분류를 통한 자기이해의 과정은 여전히 활발하며, 이러한 인기가 쉽사리 사그라들지는 않을 것 같다.

분류의 목적은 가시화와 항목화에 있다. 너무나 다양한 개체들을 일정한 틀 안에 정리하여 분명하고 직관적으로 파악할 수 있게끔 하는 것. 그러나, 여러 가치가 상존하고 개개인의 주체성이 중요해지는 사회의 흐름과 더불어 분류 집단의 양태는 더욱 세분화되는 듯 보인다. 불과 4가지였던 혈액형은 어느덧 4배에 이르는 MBTI로 대체되었고, 최근에는 보다 세밀해진 MBTI와 더불어 동물과 직업, 색깔 등 여러 표상들로 특징을 나타내는 분류가 인기를 구가하고 있다. 나에 대해 더욱 깊게 알고자 하는 주체적 욕망은, 다양한 기준들을 통해 개인과 소속 집단의 크기를 일치시키고자 하는 데에 이른다. 분류의 극단에는 결국 개개인이 하나의 집단을 형성하게 될 것이다. 그러한 점에서, 분류의 목적은 다른 방향성을 갖게 된다. 분류는 집단으로의 소속이 아닌, 각 개인이 내면의 것들에 대해 이름을 부여하는 과정인 것이다. 분류는 어쩌면 먼 길을 돌아 나를 알아가는 과정이 아닐까. 그러고 보면, 나를 분류해나가는 여정은 언뜻 여행과 닮아 보이기도 한다.

우리는 이 알 수 없는 세상에서 우연히 태어나버렸다. 선택하지 않은 얼굴과 출생지, 기질과 성격을 지니게 되었고, 이러한 우연의 산물들은 삶의 곳곳에서 우리에게 지대한 영향을 미친다. 그렇기에, 이곳저곳에 나를 대입하고 분류하는 일은 이러한 우연적인 것들에 이름 붙이며 나를 이해하는 과정일지도 모른다. 개인에서 시작한 분류의 끝이 개인으로 이르는 이 수미상관은, 마치 인생과도 비슷해 보인다. 무에서 시작하여 흙으로 돌아가 무로 침잠하는 생의 논리는 분류와 닮았으며, 이는 삶의 의미가 결과가 아닌 과정에 자리할지도 모른다는 사실을 내비친다. 무수한 분류의 끝에는 나 자신이 있을 것이다. 나의 기질과 성격, 외양과 내면의 침전물들이 그 자리에 그대로 머무른 채로 말이다. 변한 것은 없다는 허무한 사실은, 그러나 무의미한 것만은 아닐지도 모른다. 우리가 지녔던 것들은 어느 순간 저마다의 특별한 이름을 부여받았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는, 비단 자기 자신에게만 해당되는 건 아닐 것이다.

소란한 복도와 계단을 지나쳐 나는 교실로 들어간다. 점심시간이 한창인 교실은 노래와 춤, 공놀이와 보드게임에 열중하는 아이들로 북적이며, 담임을 발견한 몇몇 아이들은 인형을 손에 든 채 웃으며 달려온다. 20명 안팎의 이 아이들에게도 각각이 지닌 이름들이 있겠지. 1년의 반환점을 지나는 여름, 아이들이 가진 이름들을 읽어내기 위해 나는 여전히 분류와 이해의 작업을 반복한다.


#영화


2017년 1월, 수능이 막 끝난 나는 친구들과 함께 서울로 여행을 떠났다. 난생처음 가는 롯데월드에서 잔인한 높이의 자이로드롭을 처음 타 보고, 기진한 채 친구들과 향한 광화문 거리는 집회가 한창이었다. 당시 정점을 지나는 중이었던 촛불집회는 주최 측 추산 100만 명에 육박하였고, 과연 거리는 몰려든 인파로 발 디딜 틈이 없었다. 우리는 지하철 계단에서 사람 좋게 생긴 아저씨가 건네주신 팻말과 LED 촛불을 손에 든 채 좌우를 두리번거리며 집회의 행렬을 따라 걸음을 옮겼다.

광장 복판에 설치된 시설 위로 유명 인사들과 세월호 유족들, 정치인과 여러 단체의 대표들이 자리했고, 그 광경을 바라보던 나의 시선에 문득 태극기를 손에 든 채 일사불란하게 움직이는 한 무리의 사람들이 들어왔다. 나이대가 제법 있어 보이던 이들은 추운 날씨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태극기를 거침없이 펄럭이며 결연한 얼굴로 당시 대통령의 이름을 연호했다. 그들의 뒷모습을 좇던 나의 귓가에, 분노에 찬 누군가의 외마디 욕설이 들렸다. ‘아니, 저 인간들은 머리가 어떻게 된 건가. 당최 이해할 수가 없다니까.’ 공중에서 잠시 맴돌다 점차 희미해지는 그 문장들과 함께, 줄지어 움직이던 그들의 모습 또한 시야에서 점점 흐릿해졌다. 나는 그들이 있던 자리를 가만히 바라봤다. 마치 눈에 보이지 않는 무언가를 잡으려는 듯이.

사상 최대 규모의 인파가 운집된 집회는 성공적으로 끝났고, 헌정 최초 대통령의 탄핵으로 귀결되었다. 탄핵 가결이 거의 확실시해지던 시기, 설을 맞아 강진에 있는 외가로 내려간 나는 TV를 보며 혀를 차시던 외할머니의 모습을 보았다. 새마을 운동이 한창이고 나라가 점점 발전해간다는 게 체감이 되던 80년대. 당시를 살아낸 외할머니에게 있어 박정희는 참된 군주이자 리더십 있는 지도자였을 것이다. 군부독재의 여파가 생경하게 느껴질 리 없는 외진 시골에서 생활해 오신 외할머니였기에, 그의 뜻을 이어받은 딸이 시민과 언론에 의해 공격받는 모습에서 안타까움을 느낄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나는 문득, 그날 태극기를 손에 쥔 채 목이 터져라 대통령의 이름을 부르짖던 그들이 떠올랐다. 백발이 성한 노인들이었던 그들은 과연 시대에 반하는 괴물이자 악마에 다름 아니었던가. 그들도 나의 외할머니처럼 꼬박꼬박 세금을 내며 힘들게 자식을 키워낸 마음 따뜻한 가족이자 이웃은 아니었을까. 수많은 이들의 질타와 욕설에도 꿋꿋이 걸음을 옮기던 그들의 모습은 오래도록 나의 머릿속에 남게 되었다.

즐겨 찾는 한 영화 평론 웹툰을 보던 중, 김재환 감독의 <미스 프레지던트>(2017)라는 다큐멘터리 영화를 알게 되었다. 소시민이자 이웃, 친근한 할머니 할아버지였던 이들은 저마다의 기억 속에 소중하게 남아 있는 대통령과 그의 딸을 지키고자 거리로 나서게 된다. 정치 선동가가 나누어주는 태극기와 함께 손에 쥐여주는 영문 모를 몇 푼의 지폐. 서로 인사하고 다독이며 힘차게 연호하는 대통령의 이름은 삶의 말미에서 뜻 모를 힘을 자아내게끔 한다. 어릴 적 즐거움을 만끽하듯 환히 웃는 한 노인이 자리한 예고편을 보며, 나는 차마 이 영화를 시작할 수 없었다. 하지만, 그날의 기억처럼 마음 한켠에 저장해 둔 이 영화의 존재는 삶의 순간마다 불현듯 떠오르며 어떤 잔상을 남기곤 했다. 아마도 20살의 겨울, 그들의 뒷모습을 하염없이 바라보았던 그날로 나를 데려가 주지 않을까. 매번 망설이다 포기하곤 했던 이 영화는, 그러나 이 글을 쓰는 지금에서야 왠지 볼 수 있을 것만 같은 기분이 든다. 여름이 한창인 6월의 마지막 주말, 나는 이 영화를 비로소 감상하려고 한다. 그 속에 있는 그들의 이야기를, 결연한 의지로 태극기를 흔들던 그들의 삶을 나는 조금 더 가까이에서 보고 싶다.


<미스 프레지던트>(2017), 출처 : 인디플러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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