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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주현석 Jul 13. 2024

청소

주절주절 #19

#청소


금요일 3시, 대부분의 아이들은 하교를 마쳤고, 텅 빈 교정은 고요함 속에 가끔씩 바람 소리가 내려앉았다. 퇴근 전, 일주일 간 북적이던 교실 곳곳에 내려앉은 먼지들을 털어내려 재즈 플레이리스트를 재생한 후 홀로 청소를 시작했다. 빌 에반스와 짐 홀의 연주를 들으며 쓰레기통을 비우고 교실 뒤편을 쓸고 닦으며 부지런히 쓰레기를 모았다. 일반 쓰레기는 봉투에 넣어 쓰레기장에 버리면 되는데, 문제는 교탁 한켠에 무질서하게 쌓여 있던 막대한 양의 서류들이었다. 종이는 분리해서 버려야 하는데, 이면지와 파쇄, 단순 처리할 종이들을 어떻게 분류해야 하나 고민하다가 결국 종이 가방에 모두 담은 후, 캐비닛에 그대로 넣어버리고 문을 닫았다. 곧 방학이니 한 번 대청소할 때 처리하지, 뭐. 약 1시간 반의 노력 끝에 교실은 나름 깔끔해졌고, 캐비닛 속에 든 종이 뭉치들은 곧 머릿속에서 잊히게 되었다. 매주 금요일 퇴근 전이면 늘 하는 것처럼, 나는 텅 빈 교실을 사진으로 남긴 후 짐을 챙겨 유유히 학교를 떠났다.

집에 와 씻고 침대에 누워, 일주일간 있었던 일들을 가만히 떠올렸다. 방학 전 성적 처리 기간이라 정말이지 정신이 없구나. 이번 주도 늘 그렇듯 아이들은 다투고 화해하기 바빴지. 매번 뾰로통한 얼굴로 다가와, 친구들이 자기들끼리 친하게 지내는 게 기분이 나쁘다던 아이의 얼굴이 머릿속을 스쳤다. 이야기를 듣고, 나는 잠시 어떻게 해야 하나 고민하곤 했다. 아니, 아이들이 자기들끼리 잘 노는 데 그게 기분 나쁘면 어떻게 하라는 건가! 아마 자기와 더욱 친하게 지내지 않는다는 사실에서 느끼는 질투심이겠지만, 그렇다고 다른 아이들에게 서로 데면데면하라고 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웬만하면 자기 입장을 물리지 않을 것 같은 고집스러운 표정을 앞에 두고 나는 숙고한 끝에 결정을 내렸다. 그래, 아이의 마음 자체는 이미 생겨버린 것이다. 그건 인정하고, 사후적 대처에 집중하자.

“OO이가 기분 나쁜 건 그럴 수 있어. 자기들끼리 친하게 지내는 모습에 질투할 수 있지. 그 마음 자체가 잘못된 건 아냐. 그런데, OO이는 결국 다 같이 친하게 지내고 싶은 거지? 그렇다면, 둘이 아니라 셋이 같이 놀기 위해서 OO이가 할 수 있는 일을 찾아보자!”

그렇게 쉬는 시간 동안 아이와 나는 어떻게 하면 둘보다 나은 셋이 될 수 있을 것인가 머리를 싸매며 고심했고, 결론은 엉뚱하게도 점심 식사를 하며 고민 같은 건 애초에 없었다는 듯 웃으며 놀고 있는 아이들과 그걸 보며 벙찐 나의 해피 엔딩으로 끝이 났다. 아니, 이럴 거면 왜 투덜거린 건데!

아이들은 자기감정을 표현하는 데 있어 더없이 솔직하다. 조금만 기분이 나빠도 면전에 대고 바로 감정을 말해버리는가 하면, 애초에 표정 자체에서 확연히 드러나곤 한다. 그 감정들이 모두 합리적 이성에 기댄 결과는 아니기에, 교실에서의 다툼은 잦을 수밖에 없고 덕분에 교사는 경찰과 판사라는 이중의 역할을 수행하느라 진땀을 뺀다. 점차 나이가 들고, 사회화가 진행되면서 우리는 점점 자신의 감정을 숨기는 법을 배운다. 타인과 원만하게 살아가는 방법. 이는 감정을 선별하여 드러내는 일련의 과정에 대한 것이다. 행복한 교실에는 배려와 존중이 넘칠 뿐이다. 그 어디에도 질투와 분노, 시샘과 혐오는 보이지 않는 것이다.

그러나, 본래적인 인간의 감정은 그 스스로 우연히 발현하는 것이다. 이성적 사고에 기인한 이해와 선별은 사후적이므로, 이해되지 못한 감정들이 어디로 향하는가에 대한 의문은 나의 오랜 관심 대상이었다. 깨끗한 교실을 완성하는 캐비닛 속 뭉친 쓰레기 더미처럼, 이성과 도덕을 이루는 사회적 인간의 내면 한구석에는, 미처 방류되지 못한 감정의 더미가 있지 않을까. 서로 어울리며 살아야 하기에, 비합리적이고 악하다 여기는 감정들을 우리는 부단히 숨기고 가두려 노력한다. 그러나, 그럼에도 쓰레기는 실재하며 감정 역시 존재한다. 깔끔한 교실 풍경에 익숙해진 어느 날, 캐비닛을 열어보고 그 안의 쓰레기를 보며 문득 낯섦을 느끼는 것처럼 가두어진 감정을 인식하는 순간 인간의 고통이 시작된다. 이해하려 하지 않았던, 부재한다 여겼던 감정들은 존재했고, 그들은 역시 나라는 인간을 이루는 질료였던 것이다. 이를 단순히 부정하고 교화하려 하지만, 이미 존재하는 것들은 쉽게 사라지지 않는다. 그리고, 지난한 자기혐오는 이 지점에서 태동하기 시작한다.

그 쓰레기들은 존재한다. 감정들은 생겨나 버린 것이고, 그렇기에 그 자체로 이해되어야 한다. 설령 그 감정들이 잔혹하고 비윤리적인 것들이라도, 발현 방식의 교정과 감정 자체의 부정은 다른 문제다. 후자는 인간을 괴물로 만들고, 괴물은 삶을 비극으로 이끈다. 메리 셸리의 <프랑켄슈타인>에서, 괴물은 그를 괴물로 인식하는 주변인들에 의해 스스로를 악마로 규정하기에 이른다. 그는 이해받지 못했고, 결국 괴물이 되었다.

그렇다면, 켜켜이 쌓인 감정들의 더미는 결국 어디로 가는가. 이들이 소각되기 위해서는, 각자에 대해 이름을 부여받고 이해되는 과정을 거쳐야 한다. 그리고, 이를 위해 우리는 부지런히 예술을 좇는다. 도스토예프스키, 카뮈와 카프카의 소설들을 읽으며, 노파와 아랍인을 살해하고 길을 잃고 헤매는 인물들을 통해 우리 내면의 감정들을 읽어낸다. <대부>(1972)를 보며 운명에 의해 비극으로 치닫는 인물과 자신을 동일시하고, 로댕의 조각상을 보며 뒤틀린 욕망으로 가득한 세계를 인식한다. 부조리와 고통으로 신음하는 인물들과 세상이 서사 속에 존재한다는 사실은, 우리의 알 수 없는 감정들로 하여금 이해받도록 이끈다. 이 지독하고 고통스러운 욕구와 감정들은 그러나 우리가 인간이라는 사실을 부정하지 않는 것이다. 이해받은 감정들은 더 이상 쓰레기가 아니다. 표출된 기쁨과 환희가 승화되듯, 이해받은 욕구와 충동들도 휘발하게 된다. 물론, 이들은 끊임없이 생겨나고 사라지길 반복할 것이다. 그렇기에 우리는 부지런히 소설을 읽고 영화를 감상한다. 이들이 끝없이 이해받도록 하기 위해. 우리가 인간이라는 사실을 잊지 않기 위해서.

엘렌 식수는 <글쓰기의 사다리 세 칸>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글쓰기는 쓰기 전까지는 알 수 없는 것을 쓰는 일입니다. 글쓰기는 앎 이전의 앎이고 눈이 멀어 말로는 알지 못함입니다. 그것은 눈멂과 빛이 만나는 지점에서 일어납니다.’ 나의 내면에 있는 알 수 없는 감정들은 여전히 삶의 곳곳에서 가시처럼 자극을 느끼게끔 한다. 이러한 고통을 다루고자 그간 부지런히 책을 읽고 영화를 보며 여러 작가와 작품들을 탐했다. 그러나, 그들의 이해와 위로에도 불구하고 내면 깊숙이 자리한 캐비닛에는 여전히 어떤 감정의 더미가 처박혀 있는 듯하다. 언젠가부터, 나는 글을 쓰기 시작했다. 여러 편의 글들에서 나는 나의 생각과 감정들을 전시하고자 하였으며, 여전히 나의 글쓰기는 알 수 없는 어떠한 것을 쓰고자 하는 몸부림이다. 아마도, 당분간 이러한 시도는 지속되지 않을까 싶다. 나의 캐비닛 곳곳에는 다양한 감정과 욕구의 잔해들이 널브러져 있다. 나는 글쓰기라는 열쇠로 필사적으로 캐비닛의 문을 열어젖히며, 그 안에 든 더미들을 읽어 내려 빛을 들이민다. 빈 종이 위에 획과 획이 흔적을 남기고, 머물러 있던 감정들은 조립된 글자 속에서 비로소 이해되어 사라지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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