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주현석 Jul 20. 2024

방학

주절주절 #20

#방학


3월 16일에 첫 글을 썼으니, 이 시리즈도 어느덧 4달에 이르렀다. 매 화마다 분량은 어느 정도 낙폭이 있었지만, 그럼에도 매주 거르지 않고 꾸준히 19편의 글을 썼다는 게 새삼 뿌듯하다. 서로이웃 공개로 설정한 탓에 읽는 이의 유입이 많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관심과 격려가 얼마나 소중한가에 대해 알 수도 있었던 봄과 여름이었다. 댓글 하나, 읽음 횟수 하나에도, 누군가가 내 생각과 삶을 읽어주었다는 기쁨을 느꼈다. 변변찮은 글에 애써 달아주는 말들도 모두 소중했다.


첫 시작은 회식 다음 날 토요일, 눈을 비비며 멍하니 일어나 책상 위에 앉았을 때였다. 전날 승진에 대한 많은 이야기가 오갔고, 과연 나는 이 직업을 얼마나 계속할 수 있을 것인가에 대한 의문이 들었다. 교사라는 직업적 안정성은 사람들로 하여금 당연히 정년까지 지속해나갈 일로 인식되곤 한다. 게다가 지역 특성상, 남자 교사는 대부분 승진을 준비하는 분위기라고 한다. 그들 앞에서, 나는 작가가 될 것이며 언젠가 이곳을 떠나리라 말하기가 머뭇거려졌다. 과연 나는 나 스스로도 작가라는, 소설가라는 직업에 확신을 가지고 있는가. 그냥 이렇게 안정되고 예상 가능한 초등 교사로 무난하게 살아가는 게 더 낫지 않을까. 이성적인 판단에도 불구하고, 왠지 모르게 감정은 자꾸만 이탈의 꿈을 추종했다. 작가라는 단어를 쉽사리 손에서 놓지 못했다. 이렇게 삶을 재단하고 싶지 않았다.


흩뿌려진 조각들을 하나씩 훑다 보면, 어느새 하나의 완성된 퍼즐이 맞춰지지 않을까. 앞으로 간간이 써 볼 글들은, 나라는 모순 덩어리를 이해하고자 하는 이런저런 넋두리이며, 삶이 그래도 살아갈 만한 것이라는 가벼운 자기합리화이다.

24.03.16.


첫 글은 이러한 생각에서 시작했다. 삶은 고통스럽고 부조리하다는 비관주의자라 여기며 살아왔지만, 그럼에도 주변 사람들과 지나는 하루에서 많은 힘을 얻곤 하는 이 아이러니에 대대 말하고 싶었다. 교직 생활에 만족하지만, 그럼에도 다른 곳을 향해 나아가고 싶다는 양가감정을 드러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당시 좋아하는 작가가 칼럼에서 자신의 생활과 사유를 풀어나가는 것에 영향을 받았다. 아, 답을 좇는 글이 아닌, 그저 길을 따라 흘러가는 과정 자체를 드러내는 글을 쓰자. 그렇게 19편의 글을 썼고, 이 글을 쓰기 직전 다시 한번 읽었다. 그 글들은 거의 대부분 마무리가 지어지지 않았다. 문장은 마침표로 끝이 났음을 알렸지만, 글에 녹아든 생각은 여전히 길을 걷는 중이었다. 그러한 점에서, 19편의 글들은 모두 이어져있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이 글 역시 그러한 걸음의 연장선일 것이다. 여전히 나는 여러 마음들 사이에서 고민하는 중이다. 길은 끝나지 않는다. 나그네는 영원히 떠돈다.


처음에는 10편의 글을 끝으로 마무리를 짓자는 생각을 했다. 그러나, 10번째 글을 올린 후에도 하고 싶은 말들이 많았다. 당시 갑자기 사람들을 만날 일이 생겨서 더욱 그랬는지도 모르겠다. 내친김에 조금 더 적어나가 보자. 그렇게 다시 10주가 흘렀고, 물론 부록 느낌으로 적은 몇 편의 글들이 더 있긴 하지만, 오늘까지 총 20편의 글을 쓰게 되었다. 공교롭게도 20번째 글을 쓰는 이 시점은 방학을 코앞에 둔 때다. 이제는 잠시 이 챕터를 내려놓을 때가 되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일에도 쉼이 필요하듯, 생각의 표현에도 휴식이 필요하다는 것을 느꼈다.


좋아하는 감독인 짐 자무쉬의 <패터슨>(2016)에서 패터슨(애덤 드라이버)은 작은 마을버스 기사로 일하며 반복되는 하루하루를 살아간다. 버스에 탑승한 승객들을 마주하고, 그들의 이야기를 건너 들으며 일이 끝난 후 집에서 아내와 밥을 먹고 개와 함께 산책을 한다. 이 평범한 하루의 곳곳에서, 그는 가끔 시를 쓴다. 떨어지는 폭포를 보며, 지나가는 사람들을 보며, 일상의 무수한 순간과 장면들을 그는 순수한 언어로 그려낸다. 시를 쓰는 패터슨의 모습은 영화가 끝난 후에도 오래도록 잊히지 않았고, 나는 패터슨이 시를 쓰듯 간간이 이 영화를 찾곤 했다. 언제나 반복되는 일상과 다름없는 세상에서 삶의 의미는 어떻게 발견되며, 권태는 어떻게 극복되는가. 그의 기쁨과 살아있다는 감각의 매개가 시였다면, 나는 글이었던 것 같다. 정신없는 봄과 체력적으로 힘들었던 여름, 퇴근 후 집에 와 책을 읽고 산책을 하며 음악을 듣는 하루의 반복에서 나는 가끔씩 글을 썼다. 일상의 순간들과 생각의 편린들을 포착해 글로 녹여낼 때, 나는 삶을 살아간다는 것을 실감하곤 했다. 발터 베냐민은 ‘과거는 기억으로만 실존한다’고 논한다. 그는 현재와의 관계 속에서 과거를 현장화시키는 기억의 실천을 의미하는 ‘회억(Eingedenken)’ 개념을 제시한다. 매 순간 과거가 되어버리는 시간과, 타인이 되어버린 과거를 글로 붙들어 놓음으로써 나는 일련의 삶을 감각하곤 했다. 그 속에 무슨 의미가 있을 거라 믿었다.


한 달에 조금 못 미치는 방학 동안 뭘 할지 특별한 계획은 세워놓지 않았다. 아마, 한 1주일 정도는 서울에 있을 것 같다. 파주에도 들러보고 싶고, 진도도 한 번 가볼까 싶다. 그간 무던히 구상만 했던 소설을 이제는 정말 써야 할 것 같다. 가고 싶었던 전시도 부지런히 다니고, 책도 원 없이 읽고 싶다. 짧은 방학이 끝나면, 계절은 서로의 자리를 교대할 준비를 하고 있을 것이며 아이들은 조금 더 자라있을 것이다. 여전히 변한 것은 없으며, 시간은 묵묵히 제 할 일을 해 나갈 것이다. 그러나, 이 여름 잠시의 쉼표는 그저 공백으로만 끝나지는 않을 것 같다. 글자와 글자 사이, 끝이 휘어진 점 뒤로 이어진 작은 공백에서 나는 표현되지 않은 어떤 것을 감각하려 한다. 이탈이 끝나고, 다시 문장이 시작될 때면 잠시 멈췄던 글을 시작하게 되지 않을까. 길은 여전히 걷는 중이며, 나는 아직도 정답을 찾지 못한 채 헤매고 있다. 하지만, 그 걸음 자체도 하나의 춤사위가 되고 소중한 순간이 되리라 믿고 싶다. 여전히 나는 하고 싶은 말들이 많다.



<패터슨>(2016), 출처:그린나래미디어(주)



#음악


만약 네가 먼저 죽는다면 나는 너를 먹을 거야. 그래야 너 없이도 죽지 않고 살 수 있어.

<구의 증명>, 최진영


구를 담은 먹는다. 구를 담은 사랑했기에, 구는 그렇게 담의 몸 안에서 증명된다. 이 그로테스크한 소설을 나는 군 시절, 휴가를 받아 광주로 떠나는 기차 안에서 읽었다. 단숨에 소설을 읽고, 자리에 놓인 커피를 마셨다. 이 쓴 걸 왜 마시는 걸까. 입안에 커피를 잠시 머금었다. 어렴풋한 산미가 느껴졌다. 커피를 삼켰다. 목을 타고 차가운 느낌이 흘렀다. 광주에 곧 도착한다는 안내 방송이 울렸다.


먹는다는 행위는 무엇일까. 우리는 부단히 무언가를 먹으며 살아간다. 더 좋은 것을 먹고 느끼기 위해 사람들은 아낌없이 돈과 시간을 지불한다. 때로는 여러 이유로 먹는 것을 줄이거나 ‘먹지 않음’을 선택하기도 한다. 그러나, 이성의 개입에도 불구하고 먹는다는 것은 생존 자체와 직결된다는 점에서 본능적이다. 살기 위해 우리는 먹어야만 한다. 그렇기에, 먹는다는 것은 삶을 감각하는 하나의 방법이다. 때로 삶이 고통스럽게 느껴지면 우리는 먹은 것들을 게워내곤 한다. 캐럴라인 냅은 저서 <욕구들>에서 ‘거식증 환자는 자신의 허기와 취약성을 분명히 보이게 만들기 위해 굶는다.’라고 말한다. 먹는 행위가 삶을 느끼는 방법이라면, 구토와 먹지 않음은 삶을 감각하는 바를 드러내는 방법이다. 차마 소화되지 못한 삶의 잔향들은 결국 입 밖으로 다시금 쏟아져 나온다. 형체를 알아볼 수 없는 존재는 몸 안에 머물렀지만, 끝내 하나 되지 못한 슬픔이자 고통이다.


가수 정준일의 곡 <Love Again> 뮤직비디오는 담담히 음식을 먹는 한 여자를 비춘다. 그녀는 천천히 음식을 먹으며, 이윽고 눈물을 쏟는다. 자세가 무너지기 시작하고, 음식을 먹는 손은 점점 빨라진다. ‘무언가를’ 먹는 그녀의 행위는 점차 ‘먹는’ 행위 자체가 되고, 쑤셔 넣는 음식은 제 의미를 잃어버린다. 한없이 음식을 욱여넣던 그녀는 결국 화장실로 향해 먹은 것들을 모두 게워낸다. 앞으로 꺾인 목에서 소화되지 못한 기억들이 쏟아지고, 다시금 텅 비어버리게 된 그녀는 마침내 울음이 터진다.


눈을 뜨면 아침이 되고, 우리는 다시 무언가를 먹는다. 그것은 음식이자 음료이기도 하고, 음악이자 기억이고 사랑이자 슬픔이기도 하다. 때론 먹는 행위 자체가 고통스럽지만, 그럼에도 우리는 살기 위해 먹고 또 먹는다. 부른 배를 안고 잠이 들기도 하며, 미처 소화되지 못한 것들을 게워내기도 한다. 노래가 끝나고, 방 안은 다시 고요가 찾아들었다. 이 곡이 지금은 끝나지 않았으면 좋겠다. 뮤직비디오를 다시 재생하고, 커피를 한 잔 우린다. 카페인이 잠을 늦추듯, 이 순간에 조금 더 머물고 싶다. 그녀가 다시 나타난다. 그녀는 음식을 먹고, 눈물을 쏟다가 모든 걸 게워낸다.


<Love Again>, 정준일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