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대를 잘못 만난 최후의 과학적 점성술사이자 최초의 천체물리학자
시대를 지배하던 이념을 뒤엎는 주장을 하는 사람들 중 왜 어떤 사람들은 추앙받고 어떤 사람들은 시련을 겪게 되는 것일까? 칼 세이건이 "최후의 과학적 점성술사이자 최초의 천체물리학자"라고 평가한 케플러는 점성술로 황실 수학자가 되는 아이러니한 전성기를 맞지만 지동설과 타원궤도라는 아리스토텔레스적 우주론과 플라톤적 우주론에 의문을 던지는 지적 성찰 덕에 말년을 불우하게 보냈고 무덤조차 훼손되고 만다. (심지어 최초의 SF소설이라고도 불리는 그의 소설 <꿈>의 설정 때문에 그의 어머니가 마녀 재판을 받기도 했다.)
그가 명예나 금전에 밝은 사람이었다면 탄탄한 재정적 지원을 받을 수 있는 황실 수학자의 위치에서 태평이 살았겠지만 우주에 대한 지적 호기심은 그를 궁핍한 천체물리학자의 길로 인도하였다. 아마 그가 어떤 사명감에서 그 길을 택했다기보다 가난하고 병약한 아이에서 황실 수학자가 되기까지 따른 몇 번의 행운이 앞으로도 계속되리라 생각했는지도 모른다.
경제적인 압박 속에서도 천체물리학에 대한 강한 호기심으로 포기하지 않고 연구를 이어간 케플러가 살아생전 인정받았어야 할 공로는 안타깝게도 그의 사후, 뉴턴이 케플러의 법칙을 만유인력 가설로부터 성공적으로 연역해냄으로써 뉴턴의 수많은 업적 중 하나로 당대의 추앙을 받는다. 즉 태양중심설의 마지막 의문점들을 제거하고 과학혁명이 공식적으로 일어난 것이다.
파란만장했던 케플러와 달리 신앙심 깊은 모범생 혁명가 뉴턴은 과학혁명의 기반이 된 그의 법칙들을 당대에 인정받아 현재까지도 과학사에 가장 중요한 두 인물 중 한 명으로 늘 거론될 뿐만 아니라 영국의 왕족과 위인들이 무덤이 있는 웨스트민스터 사원에 안장되었다. 그리고 그의 묘비에는 시인 알렉산더 포프가 쓴 다음의 문장이 새겨져 있다.
"자연과 자연의 법칙이 밤의 어둠 속에 감춰져 있었다. 신께서 말씀하시길 뉴턴이어 있으라 하시니 모든 빛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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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실제로 사망일 밤에 하늘에서 유성우가 내렸다고 전해지는 것은 모두의 사랑을 받은 뉴턴이 아니라 쓸쓸히 죽어간 케플러라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