각각의 인물이 누구인지 알 것 같은가?
아마 왼쪽은 잘 모를 것이고, 오른쪽은 보는 순간 그 이름이 떠올랐을 것이다.
베토벤!
빠바바밤~ 하는 운명 교향곡의 한 소절이 들렸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둘 다 베토벤의 초상화이다. 왼쪽은 요셉 빌리브로르드 멜러(Joseph Willibrord Mähler)가 그린 베토벤, 오른쪽은 요셉 칼 슈타이어(Joseph Karl Stieler)가 그린 베토벤. 똑같이 독일에서 활동한 화가들이 그린 동일인물의 초상화임에도 이렇게나 다른 인물이 되어버린 것을 보면 사진 어플로 눈 키우로 턱 자르는 게 귀엽기만 하다. 게다가 더욱 놀라운 것은 베토벤의 실물에 가까운 것은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슈타이어의 베토벤이 아니라 멜러의 베토벤이라는 사실이다. 베토벤에 대한 신화가 깨지는 것 같아서 오히려 이것이 음모론이 아닐까 하는 21세기 유튜브 피플다운 생각도 들겠지만 우리가 더 멋진 존재로서의 가공을 인스타그램이 있기 훨씬 전부터 자행해왔다는 사실을 부인할 수가 없다.
19세기 낭만주의의 대표적 예술가인 베토벤은 그에 걸맞게 "천재"여야 했고 따라서 시대의 풍조에 수혜를 얻은 만큼 소외도 동시에 겪어야 했을 것이다.
상업주의에 한해서가 아니라 그 어떤 사조도 당위성을 확보하기 위해 너무도 쉽게 대상을 수단화시켜 소비한다는 생각이 든다. 그래서 내가 어떤 생각을 가지고 살아가든 나조차도 스스로를 수단화시키는 데에서 벗어난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게 느껴지기도 한다. 즉 어떤 생각을 가지고 가치판단을 하는 한 나를 가공해야만 하는 순간이 온다는 것이다. 그 가공을 기꺼이 받아들이느냐 아니냐는 그다음의 문제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