밀란 쿤데라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 2편
우리는 사랑을 아름다운 헌신이라 믿지만, 때로 그 깊은 곳에는 차마 마주하지 못한 개인의 트라우마가 숨어있곤 합니다. 테레자에게 사랑과 성(性)의 무거움은 단순한 신념이 아니라, 혐오하던 어머니의 세계—존엄이 거세된 고깃덩어리의 세계—로 추락하지 않기 위한 마지막 보루였습니다.
WNM(FOCUS)는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 두 번째 탐구를 통해 테레자의 고통스러운 내면을 들여다봅니다. 자신의 유일성을 증명하기 위해 '무거움'에 매달렸던 그녀는, 왜 자신의 가치를 정면으로 부정하는 토마시를 끝내 놓지 못했을까요?
떠나지도, 견디지도 못하는 사랑의 굴레 속에서 그녀가 발견한 것은 '살아있음' 그 자체의 육중한 무게였습니다. 우리가 사랑이라 부르는 행위 속에 숨겨진 '존재를 확인받으려는 몸부림'과, 반려견 카레닌을 통해 엿본 조건 없는 사랑의 가능성을 함께 탐구해보고자 합니다.
Q. 테레자는 왜 성(性)을 가볍게 받아들일 수 없었을까?
테레자에게 성의 무거움은 단순한 도덕적 집착이 아니라, 자신의 존재 의미와 연관 되어있다. 그녀에게 성이 가벼워진다는 것은 곧 혐오하던 어머니의 세계로 함몰되는 것을 의미한다. 테레자의 어머니에게 성은 존엄이 거세된 행위였고, 몸은 개별성이 사라진 고깃덩어리에 불과했다. 테레자에게 어머니와 같아지는 것은 '대체 가능한 존재'로 전락하는 것이자, 자신의 유일성을 증명할 안전장치를 스스로 해체하는 일이다. 그렇기에 그녀는 결코 성의 무거움을 내려놓을 수 없었다. 여기서 우리가 던져야 할 진정한 질문은 "영혼의 존엄을 갈구하는 테레자가, 왜 자신의 가장 소중한 가치(성의 무거움)를 정면으로 부정하는 토마시를 끝내 놓지 못했는가?"하는 점이다.
Q. 테레자는 왜 토마시의 가벼움을 견디지도, 떠나지도 못했는가?
테레자는 토마시가 있는 제네바를 떠나 프라하로 돌아오고, 스스로 외도를 시도하며 이 질문에 대한 답을 치열하게 탐구한다. 그러나 그녀는 결국 다시 토마시 곁으로 돌아와, 그가 선물(?)한 페트르진 언덕의 죽음 근처까지 자신을 밀어붙인다. 토마시가 지시한 그 언덕에서 처형당할 뻔한 공포를 겪으며, 그녀는 자신의 존재만큼 무겁게 느꼈던 성(性)이나 질투조차 '생존'이라는 존재 그 자체의 무게 앞에서는 절대적이지 않음을 깨달은 것이 아닐까.
그 어떤 의미도 찾을 수 없는 부조리한 인생일지라도, '살아있음' 그 자체의 무게는 우리가 부여한 그 어떤 존재적 가치보다도 더 육중하게 우리를 짓누른다. 물론 이 사실을 깨달았다고 해서 테레자가 지켜온 성의 존엄이 단숨에 가벼워지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가치관과 현실 사이의 괴리는 그녀를 더욱 고통스럽게 만든다. 그럼에도 테레자가 토마시의 참을 수 없는 가벼움을 끝내 견뎌낸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그것은 사랑이라는 이름의 연민이었을까, 아니면 자신의 무거움을 지탱해줄 유일한 타자인 토마시를 잃는 것에 대한 근원적 두려움이었을까?
Q. 테레자의 사랑은 순수함일까, 아니면 결핍에 기인한 두려움일까?
테레자는 토마시가 오직 자신만을 선택하기를 갈구하며, 사랑이 끊임없이 증명되기를 바란다. 그러나 이러한 요구의 이면에는 늘 배신에 대한 두려움과 불신이 그림자처럼 따라붙는다. 반면, 반려견 카레닌과의 관계는 어떠한 대가나 증명도 요구하지 않는 무조건적인 사랑으로 대조된다. 카레닌은 테레자의 감정에 조건을 달지 않으며, 언제나 같은 리듬으로 그녀를 반긴다. 테레자는 이 관계를 통해 불안과 질투, 경쟁이 소거된 완전한 평온을 경험한다. 결국 그녀는 카레닌과 토마시를 향한 두 갈래의 사랑을 나란히 놓아봄으로써, 자신이 원했던 것이 어쩌면 순수한 사랑 그 자체가 아니라 '끊임없이 선택받음으로써 존재를 확인받으려는 몸부림'이었음을 자각하게 된다.
밀란 쿤데라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 시리즈는 총 3편에 걸쳐 매주 목요일에 공개될 예정입니다.
기다리지 않고 바로 확인하려면 : https://wnm.kr/wnmfocus-life
▷1편: 신념으로부터 자유롭겠다는 신념
▶2편: 사랑은 사실 트라우마와 결핍의 산물이지 않을까?
︎▷3편: 인간으로서 실천할 수 있는 최선의 사랑은 무엇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