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A 1일 차
11시간의 긴 비행 끝에 드디어 LA 공항에 도착했다.
예상보다 1~2시간가량 지연된 탓에 몸이 무거웠지만, 비행기에서 내려 공항에 펄럭이는 성조기를 보니 내가 미국에 왔다는 사실이 실감 나기 시작했다.
잠시 J를 기다린 후, 입국 심사를 받으러 이동했다.
J는 미국 시민권자였기에 별도 통로로 빠르게 나갔고, 나는 혼자 외국인 입국 심사 줄에 섰다.
줄은 길었고 좀처럼 줄어들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지루함과 조급함 사이 시곗바늘은 무심하게 돌아갔다.
얼마나 기다렸을까.
거의 2시간이 흐른 뒤에야 내 차례가 되었다.
입국 심사는 꽤 까다로웠다. 질문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졌고, 나는 서툰 영어로 10여 개가 넘는 질문에 답한 끝에 겨우 통과할 수 있었다.
지친 몸을 이끌고 짐을 찾아 숙소로 향하는 차량에 올랐다. 차 안에서는 시트에 배인 낯선 향수 냄새와 시원한 에어컨 바람이 섞여 흘러나왔다.
차창 밖으로는 이국적인 야자나무들이 스쳐 지나가고, 한국과 달리 뻥 뚫린 지평선 너머로 해가 천천히 저물고 있었다.
“아… 드디어 미국 본토에 왔구나.”
실감과 낯섦이 뒤섞인 감정이 그 오렌지빛 노을처럼 서서히 마음속에 스며들었다.
숙소에 도착해 짐을 풀고 조장인 N과 처음 만났다.
친근한 인상에 붙임성도 좋아 보여서 조원들에 대한 걱정이 조금은 가셨다.
혼자만 낯가림이 심한 건 아닐까, 어색한 분위기 속에 잘 녹아들 수 있을까 걱정이 많았는데 N을 보니 마음이 한결 편해졌다.
곧이어 N, J와 함께 그리피스 천문대로 향하는 택시를 잡았다. 택시 안에서 우리 셋은 많은 이야기를 나누며 서로에 대해 알아갔다.
N은 나와 동갑이었고, 이직을 준비 중이라고 했다.
J는 학생이지만, 어릴 적 이곳에서 살았던 경험이 있어 미국이 낯설지 않다고 말했다.
서로 다른 인생을 살다 우연히 같은 여행을 시작한 사람들. 그게 조금은 신기하게 느껴졌다.
언덕 위 그리피스 천문대에 다다랐을 때, 나도 모르게 숨을 멈췄다. 영화 라라랜드를 좋아하는 사람에게는 낯이 익을 장소, 미아와 세바스찬이 별빛 아래에서 춤을 추던 장면 속 그곳. 순간 스크린 속 장면이 내 눈앞의 풍경과 겹쳐 보이며 모든 것이 꿈처럼 느껴졌다.
이윽고 도시가 어둠 속에서 서서히 빛나기 시작하자, 라라랜드의 대사 한 줄이 문득 떠올랐다.
“Here’s to the ones who dream, foolish as they may seem.”
꿈꾸는 이들에게 바치는 건배. 바보처럼 보일지 몰라도 그들은 멈추지 않는다.
어쩌면 나도 그런 사람 중 하나일지 모른다.
확신도 없고, 때로는 흔들리지만 그래도 계속 이상을 향해 나아가고 싶은 사람.
그리피스 천문대에서 내려다본 LA의 야경은 마치 그 모든 이들을 위한 별자리 같았다.
잠시 감상에 잠긴 뒤, N과 J와 함께 천문대 주변을 천천히 둘러봤다. 바람은 살짝 차가웠고, 멀리 할리우드 사인이 희미하게 보였다. 어둠이 제법 내려앉아 있었는데도 천문대에는 사람이 많았다.
N과 J는 멀리서 반짝이는 LA의 스카이라인을 배경으로 사진을 찍기 시작했다. 특히 J는 마치 모델처럼 능숙하게 포즈를 취했는데, 평소 사진에 큰 관심이 없던 나에게는 꽤 인상적인 장면이었다.
그들을 뒤로한 채 천문대 내부로 향했다. 내부에 들어서자 은은한 조명 아래 느린 호흡처럼 천천히 흔들리는 커다란 진자가 눈에 들어왔다. 진자가 바닥에 그리는 곡선은 마치 시간의 흐름을 눈으로 보여주는 듯했고, 그 주위를 둘러싼 조용한 공기와 약간 차가운 실내 온도는 박물관에 온 듯한 느낌을 줬다. 이외에도 여러 흥미로운 과학 전시물들이 전시되어 있어 하나하나 유심히 살펴보며 시간을 보냈다. 천문대의 망원경을 체험해 볼 수 있는 구역도 있었지만 길게 늘어선 줄을 보고 아쉽게 발길을 돌려야 했다.
시간이 늦어져 우리는 다시 숙소로 향했다.
오늘 하루 제대로 된 식사를 하지 못해 출출했는데 N이 나에게 브라우니를 건넸다.
한입 베어 물자 그 달달함이 입안 가득 퍼졌다.
달다. 정말 달다. 미국 음식이 달다는 말을 많이 들었지만 이 정도일 줄은 몰랐다.
숙소에 도착하기 전 우리는 근처 마트에 잠시 들렀다.
간단한 샌드위치와 음료수를 집어 들고 계산대로 향했는데, 마트 주인이 웃으며 물었다.
“Where are you from?”
“Korea”
그럼 항상 따라오는 질문,
“North? or South?”
익숙한 농담이었지만 처음 듣는 것처럼 웃어넘겼다.
여자 숙소는 2층, 남자 숙소는 3층이라 인사를 건넨 후 홀로 3층으로 갔다. 방은 4인 1실이었는데, 문을 열고 들어가자 건장한 체격의 남성이 나를 호탕하게 맞이해 줬다. 그가 나와 같은 조인 H였다.
뒤이어 같은 방을 쓰는 다른 조의 남성들과도 인사를 나눴다. 한 명은 나와 동갑인 M, 또 한 명은 나보다 형인 D였다. 2주 간 같은 방을 쓰며 지내게 될 사람들의 인상이 친절하고 선해보여 안심이 되었다.
씻고 침대에 누우려던 찰나, 갑자기 N에게서 연락이 왔다. 아까 건네준 브라우니를 다시 달라는 것이었다.
2층 여자 숙소로 내려가 N에게 브라우니를 건넸다.
그때, N 옆에 서 있던 처음 보는 여성이 눈에 들어왔다.
핑크빛이 은은히 감도는 주황색 머리, 또렷한 인상, 그리고 다소 도도해 보이는 분위기. 그녀가 G였다.
그리고 그녀의 첫마디는 뜻밖이었다.
“되게 해맑으시네요?”
어느 정도 거리를 두는 듯한 차분한 말투. 친해지기 쉽지 않겠다는 예감이 들었다.
하지만 그때는 몰랐다. 여행을 함께하며 가장 가까워질 사람이 그녀가 될 줄은.
다음 날 일정은 디즈니랜드였고, 오픈 런을 하기 위해 아침 일찍 일어나야 했기에 서둘러 3층으로 향했다.
머나먼 타지에서 낯선 침대 위로 몸을 뉘었다.
시차 때문에 좀처럼 잠이 오지 않아서 오래 뒤척이다 첫날에 마주한 풍경들을 마음속으로 천천히 정리하며 눈을 감았다.
그렇게, LA에서의 첫날밤이 조용히 저물어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