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랜만에 먹은 한식 덕분인가 컨디션이 좋다.
어젯밤 숙소 근처에 메트로폴 파라솔이 있기에 걸어갔다 왔다. 걷는 중에 보니 어딘가 익숙한 장소가 나타난다. TvN에서 했던 꽃보다 할배 스페인 편이 생각난다. 우리의 숙소가 그들이 묵었던 숙소 근처였던 것이다. TV에서 보던 장면이 눈앞에 펼쳐진다. 이런 게 여행의 묘미 아니겠는가. 메트로폴 파라솔 근처 있는 한국 식료품점에서 라면을 사 왔다. 얼큰한 국물로 속을 풀고 푹 잔 게 신의 한 수였다.
오늘은 세비야 투어를 한 뒤 한참 축제 중인 카디즈를 지나 지브롤터까지 간 뒤 론다의 파라도르에서 1박을 할 예정이다. 갈 길이 멀기에 일찍부터 서두른다.
아침을 먹고 먹고 짐을 챙겨 스페인 광장으로 향한다.
아침 해를 받은 스페인 광장은 붉은빛을 더해 찬란히 반짝이고 있다.
스페인 광장은 정말 넓다. 건축물 내외부 모두 화려하게 꾸며져 있다. 광장을 수놓은 모자이크부터 작은 운하에 떠다니는 배들, 상당한 규모의 건물과 정교하고 멋들어진 조각까지. 박람회를 보기 위해 찾아온 사람들을 설레게 만들었으리라. 특히 스페인의 역사적 사건들을 모자이크로 표현한 부분이 압권이다. 광장에서 건물을 보고 있으면 나 스스로가 초라해지는 기분이다. 문득 김태희가 탱고를 추고 한가인이 달리던 광고가 떠오른다.
운하의 조그마한 다리를 건너 육군박물관으로 들어간다. 내부는 계단부터 타일 하나까지 섬세함이 없는 곳이 없다.
스페인 광장에서 나오는 길. 주렁주렁 달린 주황색의 과일 덕에 어젯밤에 하몽과 함께 먹은 오렌지가 떠오른다. 오늘 아침에도 갈아 마셨지만 다시 식욕이 돋는다.
숙소에서 잠시 쉬다가 세비야 대성당으로 이동한다.
2세기까지 모스크가 있던 이곳에 유럽에서 3번째로 큰 성당이라니... 스페인은 이슬람 세력과 가톨릭 세력이 번갈아가며 점령한 만큼 두 문화가 섞여 묘한 분위기를 만드는 곳이 많다. 12세기까지 모스크가 있던 이곳에 이렇게 큰 성당을 건설한 것도 이슬람 세력을 물리치고 이슬람보다 스스로가 위대하다고 보이기 위함이었겠지.
성당 겉모습을 보는데만 30분은 걸린 것 같다.
유명한 관광지인 만큼 성당에 들어가기 위한 줄이 길다.
궁전의 내부는 섬세한 조각과 부조로 가득하다. 고딕 양식 특유의 절제된 모습과 내부의 화려함은 당시 교회의 권위를 보여준다. 특히 세비야 대성당은 그 규모부터 화려함까지 어느 하나 모자람이 없다. 약간은 부담스러운 화려함이 내 고개를 누른다. 질 수 없어 하늘을 올려다보니 고딕 특유의 볼트와 아치가 만드는 예술적인 천장이 보인다. 구조물로 만들어진 저 문양들은 성당마다 다양하다. 이때 이후로 성당에 들어가면 하늘을 바라보게 되었다.
이 성당에는 많은 왕들의 무덤이 있지만 꼭 봐야 하는 무덤이 있다. 바로 콜럼버스의 묘이다. 남쪽 문 근처에 있다. 콜럼버스의 유언은 "죽어도 스페인의 땅을 밟지 않겠다."였다. 그의 후손은 그의 유언에 따라 그가 처음 발견한 신대륙의 땅 쿠바에 콜럼버스를 묻었다. 이후 여러 번의 이장을 통해 과거 스페인의 왕들이 묻힌 이 성당에 안치되게 된다. 어쨌든 스페인의 황금기를 연 인물이다. 비록 원주민에게는 비극이 시작되었지만... 콜럼버스의 마지막 유언을 고려해서인지 그의 관은 공중에 떠있다. 옛 스페인의 왕국인 레온, 카스티야, 나라바, 아라곤을 상징하는 조각상이 관을 메고 있다. 죽어서 짊어지면 뭐하나 싶다.
스페인의 성당에는 유독 오렌지 밭이 많다. 코르도바의 메스키타에서도 그랬지만 세비야도 마찬가지다. 제주도의 귤나무 같은 느낌이다.
문득 그런 농담이 떠오른다.
제주도민은 항상 집에 귤나무 있냐는 질문을 듣는다고 한다. 근데 그게 사실이라 뭐라 말을 못 했다는 일화이다. 스페인에서는 귤 대신 오렌지가 아닐까?
성당 앞 광장에는 거리공연을 하는 사람이 많다. 목 없는 3인조 공연단부터 악기를 연주하는 사람들까지. 기발한 공연에 동전이 남질 않는다.
숙소 근처에 있던 필라토스의 집으로 향한다.
필라토스는 본디오 빌라도(예수를 못 박았던 인물)의 라틴어 발음으로 과거 타리파 후작이 빌라도의 집을 모방했거나 상상해서 이 저택을 지었다는 설이 있다. 성당에서 나와 빌라도의 집이라니 기분이 묘하다. 건물은 무데하르, 고딕, 르네상스 양식이 혼재되어 있어 세비야에서 가장 아름다운 가옥으로 불린다고 한다.
화려한 입구를 들어가면 조그마한 분수가 있는 정원과 멋진 기둥으로 이루어진 회랑이 나온다. 벽은 아름다운 조각으로 가득하다. 내부는 채광이 괜찮은 꽤나 멋진 저택이다. 석재 건물이라 한옥과 같은 따뜻함은 없지만 대신 시원함이 느껴진다. 관광객이 선호하는 관광지가 아니라 그런가 조용한 분위기에서 산책을 마무리할 수 있었다.
카디즈로 출발할 시간이다. 도시를 나가는 길에 마카레나 성당과 황금의 탑이 보인다.
안에 들어가 볼 시간이 빠듯하여 사진으로나마 남긴다.
지브롤터에서의 일몰을 봐야 하기에 바쁘게 움직인다.
얼마나 달렸을까. 끝없이 펼쳐진 비옥한 평야 끝에 한국에서는 보기 힘든 지평선이 보인다. 산이 없다니. 신기하다. 어느샌가 푸른 하늘이 우리를 맞았다. 세비야의 우중충한 날씨에서 벗어나 맑고 화창한 하늘을 보니 기분도 좋다.
드디어 카디즈에 도착. 카디즈 카니발이 열린다기에 기대하고 갔는데 준비만 한창이다. 카디즈 카니발은 사회 문제를 풍자적으로 비판하는 유머러스한 성격을 지닌 축제이다. 창의력과 상상력을 동원하여 사람들을 웃게 만드는데 중점을 둔다고 한다. 매년 2월 말에서 3월 초에 개최한다고 한다. 기왕 온 김에 관광이나 하고 넘어가기로 했다. 카디즈는 아메리카와의 무역의 중심지로 매우 번성했던 항구도시다. 스페인 식민지의 몰락과 함께 이 도시도 몰락의 길을 걸었지만 지금은 안달루시아에서 가장 산업이 발전한 곳 중 하나이며 휴양지로 유명하다.
카디즈 대성당, 산타 카탈리나 요새를 갔다. 정확히는 대성당 내부는 못 보고 요새만 들어갔다. 대성당은 한때 해적에 의해 전소됐었지만 이후 재건축을 했다. 바로크 양식으로 지어진 이 건물은 마치 두오모 성당을 보는 듯하다.
무역의 중심지인 만큼 요새는 위풍당당하다. 바다를 향하는 대포들이 당시 해적이 얼마나 악명 높았는지 말해준다.
벌써 해가 지려한다. 바쁘게 지브롤터로 이동한다.
지브롤터는 스페인 내 영국령이다. 들어갈 때 여권을 검사하니 꼭 챙기자. 자체적으로 공항도 있다.
심지어 주변 스페인과는 물가도 다르다! 그러다 보니 지브롤터 내에서 일하며 스페인에서 출퇴근하는 사람이 많다. 우리가 도착했을 때는 퇴근시간이라 많은 사람들이 지브롤터에서 나오고 있었다.
저 멀리 보이는 산이 지브롤터이다. 거리는 한참 남았는데 저 정도 크기라니. 지브롤터가 크긴 한가보다
퇴근 시간인 데다 출입국 수속 때문인지 차가 움직일 생각을 하지 않는다. 답답한 마음에 잠시 내려 사진을 찍어본다.
수속을 밟고 들어가 전망대를 향해 한참 차를 끌고 올라간다. 교행이 힘들 정도로 좁은 길이지만 베스트 드라이버인 우리 아버지의 운전에는 거침이 없다. 힘들게 올라가 내려다본 지브롤터는 매우 아름답다. 저 멀리 북부 아프리카의 모습도 보인다. 바다 너머로 보이는 도시는 북아프리카의 세우타인가.
아름다운 노을 덕분인가 가슴이 벅차오른다. 해가지는 모습을 한참을 보고 있다 땅거미가 지기 시작할 때 지브롤터를 벗어난다. 지브롤터 국경을 벗어나면 맥도널드가 하나 있다. 우리는 여기서 저녁을 먹고 론다로 향하기로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