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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신캐니 Nov 11. 2020

오늘의 엄마 이야기(20.11.9.)

어느새 닮아있는 인생의 모습 

"녹뱅이 아부지가 저렇게 비틀비틀거리면서 집에 들어왔는데..."

티브이 드라마에 술 취한 남자가 나오는 장면을 보며 이야기하신다.


녹뱅이 아버지는 엄마가 옛날에 봉기 할머니와 같이 학교 앞에서 문방구를 할 때 같은 동네에 살던 아저씨이다.

전신전화국에 다녔는데 술에 취하지 않으면 그렇게 사람이 온순하고 착하다고 했다.

"술만 마시면 그렇게 순하던 사람이 앞으로 한걸음, 뒤로 두 걸음 걸으면서 위태위태하게 집까지 찾아오더라."

아침에는 분명 말끔하게 출근을 하는데 저녁만 되면 집에 저 지경으로 돌아오신다.

집에 들어오면 그대로 마룻바닥에 탁 쓰러져 아침까지 주무신다.

그러면 아줌마의 잔소리가 골목길을 따라 엄마가 살던 집까지 들렀다고 했다.


엄마는 앞으로 한걸음, 뒤로 두 걸음 걷는 아저씨의 모습을 따라며 재밌어하셨다.

"아니, 그러면 사람이 앞으로가? 뒤로 가지?"

"그렇지, 그렇지. 그런데도 집에는 신기하게 돌아오대. 허허허 허."

그런데 왜 하필 녹뱅이 아부지였을까?

"큰아들 이름이 녹뱅이니까 녹뱅이 아부지지!"

엄마는 나한테 별 이상한걸 다 묻는다고 퉁명스레 대답하셨다.

아니, 아들 이름을 그렇게 이상하게 짓는 사람도 있나? 딸이라면 그 시절엔 아무렇게나 지었다고 하더라도 이해할 수가 있는데, 귀한 아들 이름을 그것도 큰아들을 그렇게 이상하게 짓다니.

"아아 니, 이름이 록! 병! 이야. 초록색 할 때 록, 그리고 병!"

엄마의 사투리 때문에 멀쩡한 이름이 녹뱅이가 되어 버린 거였다.


녹뱅이 아부지의 부인은 일수놀이를 했다. 

몸이 퉁퉁하고 얼마나 억센 사람이었는지 모른다. 

그나마 봉기 할머니와 같은 강릉사람이라고 엄마 집엔 참 잘했다고 했다.

아가씨였던 엄마를 보면 꼭 잔소리를 했다.

"아가씨는 꼭 술 안 먹는 남자한테 시집가라. 내가 아주 징글징글하다! 어쩌다가 내가 저런 술 고조를 만나서..."

녹뱅이 아부지는 착하고 직장 잘 다니는 일등신랑감이었지만 술을 매일같이 먹는 게 흠이었다.

녹뱅이 엄마는 일수돈을 수금하는 날은 꼭 택시를 타고 집에 돌아왔다.

"정말 잘 살았나 보네. 그 시절에 택시까지 타고 다니면."

잘 살아서가 아니라 혹시 돈을 소매치기당할까 봐 그런 거라고 했다.


동향이 아니더라도 동네 사람들은 봉기 할머니를 좋아했다.

학교에 올라가는 길 골목 앞에서 문방구를 하며 그 안집에 살았는데 봉기 할머니의 아침 일과는 늘 골목길을 빗자루로 쓸며 시작되었다.

"쪼그마난 할머니가 아장아장 다니면서 비질을 하니 얼마나 골목이 깨끗한지."

우리 집 앞이나 쓸지 뭐하러 골목길 저 멀리까지 다 쓰냐고 잔소리했다.

그러면 봉기 할머니는 답답하다는 듯이 대답했다.

"바람이 불면 그 쓰레기가 어디로 가나? 다 우리 집으로 날라 오지."

그러다 학교에 출근하시는 선생님을 만나면 비질을 멈추고 두 손을 모아 공손히 인사도 하셨다.

"엄마, 교장선생님도 모르면서 뭘 인사까지 해?"

"뭐 어떠나. 내 얼굴에 똥 묻었나?"

봉기 할머니는 아침마다 골목을 쓸며 그렇게 지나가는 모든 선생님에게 인사를 했다.


이 이야기는 내가 제일 좋아하는 이야기이다.

자그마한 봉기 할머니가 월남치마를 입고 쪽진 머리를 하고 서서 골목길 앞을 찬찬히 쓸어가는 모습이 눈앞에 그려진다. 

재잘거리며 등교하는 아이들 틈에 섞인 선생님께도 인사를 하고, 선생님들도 고생하신다며 같이 인사하신다. 


옆집에 살던 반장 아주머니도 같이 문방구를 했는데 문방구 물건을 떼러 업자가 오면 좋은 물건은 보자마자 반장 아주머니가 깔고 앉았다고 했다.

봉기 할머니는 늘 그 아주머니에게 잘 팔리는 물건은 양보하고 다른 물건을 받아오셨다.

그 옆집에 레코드 가게를 하던 종식네 집에 오랜만에 아빠가 찾아갔더니, 엄마의 안부를 물으며 반장 아주머니의 안부도 전해주셨다. 

반장 아주머니의 남편은 뇌출혈로 쓰러져 돌아가셨고, 아주머니도 풍을 맞아 몸이 온전치 못하시다고 했다.


엄마가 그 반장 아주머니 아주 지독하다고 싫어하셨는데, 아프시다는 이야기를 들으니 마음 한편이 쓸쓸해졌다.

지독하게도 가난하고 어려웠던 세월의 바람을 제대로 맞으신 거겠지.

하지만 사람이 술 취하고, 지지고 볶고 싸우고, 웃으며 인사하는 그 모든 일들이 지금도 똑같지 않은가.


누군가는 아프고 누군가는 죽는다. 

내가 사는 시간과 다른 시간의 이야기이지만 내 이야기처럼 느껴졌다.

내가 아는 그 사람도 그렇게 술 취해서 걸었었지.

내가 아는 그 사람도 그렇게 악착같이 돈을 벌었지.

내가 아는 그 사람도 그렇게 아프다가 죽었지.

인생은 반복되고, 가난하거나 부자이거나 행복하거나 불행하거나 사는 모습은 왠지 모두 닮아있다. 


엄마도 어느새 내가 좋아했던 봉기 할머니 손처럼 손등에 검버섯이 피고 주름이 생겼다.

나도 엄마처럼 엄마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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