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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신캐니 Nov 12. 2020

오늘의 엄마 이야기(20.11.10.)

결핍이 없는 시대를 살아내야 하는 우리

아침에 예진이가 학교 갈 준비를 마치고 식탁에 앉아 마른김에 둘둘 말아 준 김밥을 먹고 있었다.

"학교에 지각하면 맞나?"

풋.

엄마의 말에 나도 모르게 웃음이 터졌다. 

지각하면 두들겨 맞는지, 즉 체벌과 같은 벌을 받는지가 궁금하셨던 거였다.

체벌이라니. 요새 아이들이 체벌은커녕 얼마나 귀하게 떠받들여 키워지는지 알면 엄마는 눈이 휘둥그레 해질 거다.


웃음이 터진 나와 달리 예진이는 진지하게 대답했다.

"아니요. 안 맞아요. 선생님이 늦게라도 학교에 오는 건 잘하는 거래요. 점심만 먹고 가더라도 학교에 오는 게 잘하는 거래요."

"그르나? 하긴 요새는 안 때리지. 옛날엔 왜 그렇게 애들을 두들겨 팼나 모르겠다. 그 김태래 아직도 잘 살아있나? 그렇게 애들을 개 패듯이 패더니만."

김태래라고 불리던 엄마의 초등학교 담임 선생님의 별명은 '테레마이신'(테라마이신 연고: 주로 연고 타입으로 항생제가 들어있는 약)이었다.

얼마나 애들을 패는지, 어떤 애는 맞아서 제대로 걷지도 못해 울면서 집에 어기적어기적 돌아갔다고 했다. 


엄마가 초등학교를 다니던 시절은 60년대 후반에서 70년대였을 거다. 

하긴 멀지 않게 나도 초등학교를 다니던 때엔 체육선생님께 담배심부름도 해드렸고 큰 마대자루나 당구 큐대로 엎드려 뻗쳐를 한 뒤 허벅지를 맞아보기도 했으니, 그 옛날에 오죽했을까.

때리는 사람도 크게 죄책감이 없었으려니와 맞는 사람도 내가 맞는 게 뭐가 잘못된 것인지 인지하지 못할 정도로 폭력에 무감각했던 시절이 아닌가.

'사랑의 매'라는 말도 있을 정도로. 사랑이 들어있으면 폭력도 정당하다니. 

지금 생각하면 말도 안 되는 논리인데 그 당시엔 사랑의 매를 때리며 눈물을 흘리던 선생님의 이야기가 미담으로 전해지기도 했다. 

"숙제 안 했다고 때리고, 떠든다고 때리고, 지각했다고 때리고. 저 인간은 때리다가 손모가지도 안 부러지나 했다. 지들 선생들도 지각하더구먼. 왜 자기들은 벌도 안서나? 참 나. 아마 그 인간은 집에 가면 마누라도 팼을거야. "


엄마는 초등학교 시절의 어린이로 돌아갔다. 

그래서 학교 가기 싫었다. 

봉기 할머니가 물었다.

"니는 왜 학교 갈 생각은 안 하고 앉아있나. 공부하는 년이 방구석에 그러고 뭉그적 대고 언제 학교 가나?"


학교가 가깝기나 했으면 다행이었지만, 키도 작은 엄마는 아침 일찍 꽁보리밥을 딱 반 주걱만큼 먹고 학교에 걸어갔다.

배가 고파 죽겠는데 점심에 밥도 아니고 옥수수 빵을 줬다.

그나마도 각자 한 개씩 주는 게 아니라 옆 짝꿍과 반씩 나눠 먹었다. 

가위 바위 보 해서 이긴 사람이 조금이라도 큰 조각으로 잘린 빵을 먹고, 집에 돌아오면 또 배가 고팠다.

아침에 먹었던 보리밥이라도 남았으면 좋으련만, 그마저도 텅텅 비어있었다.


배가 고픈 일이 일상이었던 적이 나에게도 있나. 나는 없다.


현기영의 소설 '소드방 놀이'를 보면 흉년이 들어 나무껍질도 모두 벗겨먹어 없고 진흙으로 흙 떡을 빚어 먹는다는 이야기가 나온다.


 - '솥에는 쇳녹이 뻘겋게 앉아 있었다. 양식을 축낸다고 닭, 돼지를 잡아먹은 지도 벌써 오래된 일. 

요즘 들어서는 야밤중에 심지어 소 밀도살까지 성행하고 있었다. 아무리 단속하여도 막무가내였다.'


- '어린것들이 밥을 너무 처먹어서 저렇게 배가 부른가. 

종아리, 팔은 밴댕이처럼 삐삐말랐는데 어이없게도 배만 북통같이 불룩 솟아오른 아이들. 

모두가 잔대뿌리나 칡뿌리, 나무껍질 따위 거친 음식 때문이었다. 

거친 음식을 먹은 어른들은 뒷간에서 노루똥같이 까맣게 타고 딱딱한 똥을 누느라고 노상 기운이 빠지곤 했지만, 아이들에겐 애당초 이런 음식이 맞지 않았다. 

설사를 하든가, 아니면 병이 들어 올챙이배처럼 헛배만 터무니없이 부풀어 오르는 것이었다.'


피똥 싸게 가난하다는 이야기가 거친 음식 때문에 심한 변비에 걸리게 되어 나온 이야기라는 걸 알고 있었다.

솥에 녹이 슬 정도는 아니었으니 저 옛날만큼은 아니었지만 엄마는 꽁보리밥이라도 배부르게 좀 먹어봤으면 하고 늘 바랬다고 했다. 


예진이가 배고픈 걸 알까?

"엄마, 오늘 영어학원에서 돌아오는 길에 배에서 꼬르륵 소리가 났어!"

집에 돌아와 저녁을 먹으며 예진이가 말했다.

나는 많이 먹으라고 밥을 한 그릇 더 떠서 예진이 앞에 두었다.

어린애가 뱃속에서 꼬르륵 소리가 났다니 왠지 우습게도 안쓰러웠다.

어느 집 엄마는 저녁까지 배가 고플까바 오후 간식을 꼭 챙겨주기도 하는데, 나는 그만큼 부지런하지 못해서 아이가 배고픈 게 아닐까 생각이 들기도 했다.


우리는 과잉의 시대에 산다. 배고픈 느낌도 모르고 사는 건 이상한 일이다.

배가 고파야 밥을 먹고 싶어 지고, 졸려야 잠을 자고 싶은 마음이 드는 건데 내 아이에게 조금의 결핍도 허락하지 않는다. 


엄마는 배가 고파서 더 악착같이 살았지만, 지금 나는 무엇 때문에 열심히 살아야 하는지도 모르겠다.

악착같이 살아도 배고픈 걸 면하는 건 힘들었었고, 지금은 열심히 살아도 공허함을 채우기가 힘들다.

우울증에 걸리고, 자살하고, 마음이 병든 지금의 수많은 아픔과 배가 고파 굶어 죽고 병들던 지난날의 아픔과도 이상하게 연결이 된다.

배가 고프게 살았던 어른들은 이렇게 좋고 편한 세상이 무엇이 문제냐고 되묻는다.


배고픔의 해결은 축복이 아니라 또 다른 문제의 시작이 되었다.

하나의 결핍을 해결한다고 해도 또 다른 결핍이 생겨나고 같은 질량의 문제로 우리 인생에 나타난다.

그래서 모든 인생은 똑같이 힘들다.

비난하기보다는 서로 아픔의 무게를 공유하고 안아야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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