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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예령 Oct 06. 2022

엄마의 인생이 나에게 닿았다

엄마가 내게 속마음을 털어놨던 그 날




글을 시작하며

조심스럽게 꺼내어보는 마음


음, 뭐랄까. 이번 글은 첫 자를 적어내기 전까지 평소보다 꽤 많은 시간이 필요했다. 오랜 고민의 시간을 가졌다. '혹여나 이 글에 담고자 했던 나의 마음이 읽는 이에게 내 의지와 다르게 해석이 되면 어쩌지?'라는 걱정이 많이 들었던 것 같다. 도대체 어떤 이야기길래 이렇게 뜸을 들이는가 싶겠지만, 적어도 우리 가족의 이야기를 풀어내는 것에 있어, 그리고 그 속에서 내가 객관적으로 느꼈던 부분들과 이 매거진을 준비하며 엄마에게 전하고 싶었던 나의 진심을 글의 목적과 다르게 풀어내고 싶지만은 않았다.


이 글의 주요 에피소드는 바로 엄마와 할머니의 '고부 이야기'를 담고 있다. 그다지 훈훈할 수만은 없었던 우리 가족의 '고부갈등'에 관한 이야기를 지금부터 조금씩 풀어보려 한다. 동시에 이 글은 누구 한 명의 편을 들거나 하는 의도가 전혀 없음을 밝힌다.(나는 누구보다 우리 가족을 사랑한다.)






할머니와 엄마의 이야기

성격조차 너무 다른 두 고부사이


우리 가족은 총 다섯 명이다. 할머니, 아빠, 엄마, 나, 동생. 그렇다. 여기서 조금은 짐작할 수 있듯이 엄마는 결혼 후 26년째 시어머니를 모시며 살고 있다. 어릴 적, 하교 후 친구 어머니들이 잠시 우리 집으로 오셔서 가볍게 차를 들며 담소를 나누곤 했을 때 어렴풋이 들려온 말을 기억한다.


"어머, 어떻게 시어머니를 모시고... 자기 너무 대단하다~"

동시에 곁에서 놀고 있는 나를 보며 이렇게 말씀하셨다.

"예령아, 너희 엄마 진짜 대단한 거야~"


그러면 나는 생각했다.

'왜 시어머니를 모시고 사는 게 대단한 거지?'

태어나서부터 계속 할머니와 함께 자란 나로서는 쉽게 이해하기 힘들었다. 우리 가족은 그 정도로 어떠한 갈등이나 문제도 없는, 그저 화목한 가정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렇게 세월이 흘러갔다. 어느덧 고등학교에 입학하여 자신의 생각을 정의하고 상황을 이성적으로 판단할 수 있는 나이가 되었다. 지금도 여전히 엄마와 산책을 하며 이런저런 이야기들을 하는 것을 좋아하지만, 그때의 나 역시 엄마와 많은 이야기를 나누고 시간을 보내곤 했었다. 시간이 오래되어 정확하게 언제쯤인지는 기억나지 않지만, 그즈음 엄마는 조심스럽게 나에게 엄마의 속마음을 털어놓았다.


"엄마가 요즘 할머니 때문에 힘들다 힘들어."

나는 아무렇지 않은 표정으로 "왜?"라고 묻고는 있었지만 엄마의 이야기를 들은 첫 감정은 '당황'이었다. 엄마와 할머니가 함께 살아오며 서로에게 크고 작은 오해들이 생겼을 것이라는 생각조차 진지하게 해 본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엄마의 말에 어떻게 반응을 해줘야 할지 난감했다. 그렇다고 한 명의 이야기만으로 누구의 편을 쉽사리 들어줄 순 없기에 그 당황의 무게는 어린 나에겐 꽤 무겁게 다가왔다. 엄마의 속마음을 들은 후 나는 우리 집의 분위기를 마치 큰 스크린 영화를 보듯이 크게 보려 노력했다. 물론 그때의 내가 상황을 정확히 인지하고 판단하기란 쉽진 않았겠지만, 그래도 최대한 객관적으로 보기 위해 노력했다. 그 결과 내가 판단한 갈등의 원인은 이러했다. 크게 어긋나는 상황들은 없었지만 엄마는 시어머니의 눈치를, 할머니는 할머니대로 며느리의 눈치를 보고 있다고 생각했다. 한마디로 모든 소소한 상황들에 대해서 눈치싸움을 하고 있달까?


애초부터 가족이라는 것이 성격이 같은 사람들만 붙어서 살 수는 없는 노릇이라지만, 할머니와 엄마의 성격은 너무나 달랐다. 그렇기에 서로를 배려하는 방식과 타이밍조차 달랐다. 엇나가는 타이밍 속에 서로는 이해하지 못하는 부분들이 계속해서 생겨났다. 또 한 가지, 속마음은 그렇지 않아도 본심과는 다르게 무심히 툭 내뱉는 할머니의 말투는 엄마에게 모든 집안일과 육아에 있어 눈치를 보게 만들었던 요인으로 작용되었던 듯했다. 장을 볼 때는 '할머니가 집에 반찬이 하나도 없다고 그러더라'하며 할머니와 아빠의 입맛에 맞는 재료를 집었다. 백화점에서 아빠의 옷을 함께 고를 때면 '할머니가 별로라고 할 것 같은데'라며 할머니의 한마디 한마디를 미리 걱정했고, 함께 이마트를 가면 항상 저렴한 속옷을 구매하시는 할머니를 보며 당신도 비싼 속옷을 사면 괜히 눈치가 보인다고 나에게 속삭이며 조금이라도 싼 속옷을 집어 들었다. 내가 보기엔 별로 걱정하고 눈치를 볼 일이 아닌 것들이었지만 엄마에게는 어느덧 습관처럼 본인의 생각대로가 아닌 할머니의 행동을 먼저 예견하여 생각하고 행동하고 있었다.  






전지적 예령 시점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의 것


할머니와 엄마 사이를 오가는 미세한 전류들이 세세하게 눈에 보이기 시작했던 것은 완벽히 성인이 된 후였다. 그 전류들이 가장 잘 느껴지는 장소는 바로 부엌이었다. 내가 고등학교에 다닐 때부터 생계를 위해 전업주부였던 엄마가 직장을 얻어 집을 나가게 되면서 부엌은 전적으로 할머니의 담당이 되었다. 하지만 주말에는 또 엄마가 맡아 평일에 먹을 반찬들과 주말에 먹을 메인 요리들을 요리하기에 엄마 또한 부엌에 완벽히 손을 놓았다고는 할 수 없었다. 각자 본인만의 방식이 있어서인지 모르겠지만 부엌에 있는 작은 요소 하나에도 의견이 달랐다. 예를 들면 '아니 왜 너희 엄마는 음식을 죄다 냉동식에 얼려놓는다니'하고 할머니가 나에게 말하고, '왜 너희 할머니는 꼭 설거지를 하신 뒤 반찬통 뚜껑을 닫다가 마신채로 두신다니'하고 엄마가 나에게 말했다. 이 외에도 세세한 많은 부분들에 있어 엄마와 할머니는 달라도 너무 달랐다.


어쩌면 서로에게 직접 이야기를 하면 상처를 받을 걸 알기에 서로가 없는 틈을 타 그걸 보는 제삼자인 나와 동생에게 흘리듯 말을 하는 게 아닐까 생각했다. 하지만 당사자에게 직접 전해지지 않은 서로의 의견들은 결국 크고 작은 오해를 계속해서 만들었다. 서로의 생각과 마음이 다른 단어의 옷을 입어 엇나가게 상대에게 닿기도 하고, 또 먼저 생각한다고 한 행동들이 어긋나게 다가가 다른 의미로 마음에 와닿기도 한 듯했다.


그걸 알게 된 후에는 나는 나만의 노력을 하기로 했다. 바로 양 측의 이야기를 모두 들어보는 것. 그게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이었다. 양 쪽의 의견을 번갈아 듣고 나면, 어느 선에서 오해가 생겨났는지 대충 파악이 됐기 때문에 서로의 오해를 중재시킬 수 있는 판단을 내릴 수 있었다. 그 후로는 엄마든 할머니든 서로 오해를 하고 있는 듯하다는 생각이 들면 직접 이야기를 듣고 서로에게 상대의 입장을 대변하여 말해주었다.


하지만 살면서 생기는 크고 작은 오해의 상황들에 대해 일일이 듣고 대변하자니 점차 지치는 면도 있었다. 잘 해결되는 일이 있는가 하면, 끝까지 서로를 이해하지 못하는 상황들도 있었기에 내가 어디까지 개입해 중재해야 할지 혼란이 일었다.


결국, 엄마에게는 미안한 일이지만 솔직히 내 마음을 말하기로 마음먹고 엄마와의 산책길에 나는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엄마, 나도 엄마가 속상한 일들에 대해 최대한 이해해보려고 노력하고 있다? 근데 엄마한테는 조금 미안한 얘기일 수 있지만 나도 엄마랑 할머니 얘기 둘 다 듣다 보면 서로가 이상하다고 말을 할 때도 많아서 가끔씩은 중재를 하기 벅찬 느낌이 들 때도 있는 것 같아."

고민 끝에 전한 나의 속마음이지만 뱉으면서도 속으로는 마음이 편하지 않았다. 이 말을 하면 엄마가 어떤 생각을 할지 알기에 더욱이 그랬다.

잠시의 침묵이 흐른 뒤 엄마는 입을 떼었다.

"에휴, 그러게. 엄마도 자꾸 너한테 이런 이야기 하면 안 된다는 거 알면서도 맘 편히 이야기할 사람이 없다 보니 자꾸 너한테 털어놓게 되는 것 같네. 큰 딸이 중간에서 이리저리 힘들겠네, 미안하다 딸."






언젠가부터 느껴진 엄마의 인생

돌고 돌아, 다시 전하는 나의 속마음


어릴 땐 미처 알지 못했지만 이제는 그때 엄마가 얘기했던 힘듦의 무게를 짐작할 수 있다. 나에게 털어놓기 전까지 엄마의 마음에는 얼마나 많은 곪음의 무게가 담겨있었을까? 29살의 나이에 시골에서 시집을 왔고, 아는 사람들은 지금도 동네에 몇 되지 않는다. 다른 이에게 가족의 험담을 할 수도 없고 그렇다고 혼자 썩히는 것도 한계가 있었을 엄마의 생활이 본인에게 버겁게 다가왔을 때가 많았을 것이다. 내가 커가는 26년의 시간 동안 엄마는 분명 성격 상 아빠에게마저도 편하게 속마음을 털어놓을 수 없었을 것이라는 것도 잘 알기에 그 상대가 가장 이야기를 많이 나누는 나였을 것이라는 것을 이제는 누구보다 잘 안다. 그런 엄마의 외로움이 어느 순간 나에게 보였고, 그 외로움이 나에게 닿았을 때 나는 묵묵히 엄마의 이야기를 들어주었다. 그렇게라도 사소한 오해들이 풀리고, 답답했던 마음이 풀어지는 것이라면 나는 언제든 엄마의 외로움을 덜어줄 수 있었다. 오늘 풀어낸 나의 이야기는 여전히 현재 진행 중이다. 내가 엄마의 상황이 직접 되어보진 않았기에 온전하게 엄마를 헤아릴 순 없겠지만 언제든 들을 준비는 되어 있다는 걸 이 글을 보는 엄마가 알았으면 좋겠다. 17살 때 처음 들었던 '힘들다'던 엄마의 속마음. 이제는 그 속마음에 나의 속마음을 덧입히며 '의지해도 좋아'라고 전하고 싶다.


 




나의 속마음을 읽었을 엄마에게 보내는 P.S

엄마한테 내가 의지할 수 있는 듬직한 딸이 되었다면 난 그걸로 됐어! 예령 상담소는 언제든 열려있으니 말해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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