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속에서 피어난 작은 위안
봄. 드디어 봄이다. 매일 아침 추위에 떨며 아직 해가 채 뜨지 않은 까만 하늘을 보고, 또 그렇게 하루가 흘러 까맣게 뒤덮인 하늘을 보며 퇴근하길 몇 달이 흘렀다. 시간이 이렇게 빨리 흘러가버리는지도 모른 채 그저 하루하루를 살았더니 웅크렸던 몸을 피게 할 따스한 햇살이 반갑다.
쳇바퀴 돌듯 반복되는 일상 속에서 우리는 매일 다른 날씨로 가볍게 이야기하며 하루가 다름을 인정한다. 오늘은 어제와 다른 어떤 것을 먹을까, 누구를 만나 회포를 풀까 고민하며 같은 일상 속에 약간의 숨 쉴 틈을 만들며 살아간다.
어느 날 문득 내가 하루에 웃는 시간이 얼마나 될까, 생각이 들었다. 북적이는 사람들 틈에서 움직이지 못하고 껴서 가는 출퇴근길에 찡그린 눈살 한번, 예상치 못한 야근에 침울한 마음, 하루가 이렇게 또 다 가버렸다는 약간의 허탈감. 웃기는커녕 무표정으로 보내는 날들이 더 많으니 힘이 빠지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틈을 만드는 사람들
평택에서 뚝섬까지 왕복 4시간이 걸리는 출퇴근 길에도 아직 지치지 않고 입사 8개월을 맞이한 것을 보니 지금 내가 하고 있는 일에 대해 꽤 애정이 있는 듯 해 다행이었다.
그럼에도 반복되는 출근길은 지치는 법. 정신은 지치지 않았어도 몸이 지치는 건 어쩔 수 없는듯했다. 출근과 일, 퇴근의 따분한 반복 속에 일상의 틈이 없던 요즘그 틈새로 날 숨 쉬게 했던 사람들이 있다.
주로 SRT를 타고 출퇴근을 하는데, 지난겨울 강추위로 인해 기차가 지연되는 일이 많았다. 회사까지 기차-지하철 2번 갈아타기-걷기라는 복잡한 과정 중 첫 단추가 잘 끼워지지 않는 날엔 유독 아침부터 모든 게 잘 풀리지 않았다. 기차가 도착하면 지하철 개찰구를 향해 전력질주했다.
이어폰을 꽂은 채로 숨을 헐떡이며 정신없이 뛰던 와중에 누군가 '저기요!' 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무의식적으로 뒤를 돌아보니 잰걸음으로 뛰어오시며 나를 향해 외치는 아주머니 한분이 눈에 들어왔다. "장갑 떨어졌어요 장갑!" 하는 목소리와 함께 가리키는 손을 보니 어느새 주머니에서 탈출해 저 멀리 날아가있던 내 장갑이 눈에 띄었다. "감사합니다!" 하고 부리나케 인사를 하고 다시 정신없이 앞을 보고 뛰었다.
무사히 전철을 탄 뒤 숨을 고르며 잠시 생각했다. 모두가 분주한 아침 출근길이고 '누군가 알려주겠지' 혹은 '찾으러 다시 오겠지'하며 어쩌면 지나칠 수도 있었다고. 하지만 걸음을 멈추어 소리 내어 불러주었다는 것에 대한 고마움이 정신없던 출근길에 약간의 위안이 되어주었다.
하루는 신호등의 깜빡거리는 초록불을 보며 놓칠세라 부리나케 뛰는데 누군가 툭하고 등을 쳤다. 나는 놀라 이어폰을 빼며 휙 돌아보았다.
"저기서부터 휴대폰을 떨어뜨리고 가셔서요"
한 여자분이 살짝 가쁜 숨을 몰아쉬며 내게 휴대폰을 내밀었다. 아차 싶어서 만진 주머니에 휴대폰이 없다는 것을 깨닫는 동시에 나는 역시나 칠칠 맞구나하는 생각이 짧게 스쳐 지나갔다. 횡단보도 구간이 꽤 긴데도 불구하고 직접 뛰어와 건네주시는 작은 배려에 왠지 모르게 마음 한편이 따스해졌다.
또 하루는 기차를 타러 가던 퇴근길에 누군가 조심스럽게 부르는 목소리에 돌아보았다.
"앗.. 저기 가방 지퍼가 열려있어서요! 요 귀여운 곰돌이 키링이 계속 아래에서 달랑거려서ㅎㅎ 제가 닫아드려도 될까요?"
한 여자분이 약간은 수줍은 웃음과 함께 가방을 가리키며 말씀하셨다.
"앗 네! 아이고 감사합니다..!"
당황한 나는 약간은 구수한 말투를 내뱉으며 얼떨떨한 표정으로 감사인사를 건넸다. 기차를 타러 가는 길 내내 여운이 남았다. 어떻게 이런 세심함을 가진 사람들이 있을까? 그들이 베푼 작은 호의가 놀랍도록 반복되는 하루를 다른 날로 기억되게 한다는 사실을 깨닫던 순간이었다.
모두가 바빠진 세상, 같은 표정으로 부리나케 걸음을 옮기는 사람들. 마치 무채색 같다고 느껴질 만큼 차갑게 느껴지는 하루의 일부분이지만, 짧은 틈을 내어주는 분들 덕에 빡빡한 내 일상에도 약간의 숨이 트인다. 동시에 나도 그런 틈을 내어줄 수 있는 사람이 되어야지 다짐한다. 하얀 종이에, 혹은 검은 종이에 다른 색이 닿으면 그 중심에서 확 트이는 점이 되듯 나도 누군가에게 그런 사람이 되어주자고. 각박한 세상을 조금은 유하게 대해보자고 스스로 다짐해 보았던 지난겨울이었다.
그런 겨울을 지나왔기에 다가온 새로운 날에는 좀 더 나은 내가 되길 바라는 마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