긍정을 부정하는 나를 긍정하던 내가 부정하기로 한 사연
나는 일기를 쓰지 않는다. 한창 소셜미디어에서 돌아다닌 밈이 있다. 가수 태연 님과 아이유 님의 차이인데, 태연은 평소 일기를 쓰지 않는 사람이라고 한다. 설령 한 편을 쓴다고 하더라도 파쇄기로 갈아버린다고 한다. 반면 아이유는, 많은 이들에게 유명하듯, 일기를 꾸준히 쓴다. 일기는 그녀가 아티스트로서 그리고 한 인간으로서 창작을 시작하고 마무리하는 곳이 되는 듯하다. 굳이 말하자면 나는 태연과 같은 사람이다. 파쇄할 필요도 없이 내가 마지막으로 일기를 쓴 건 약 10년 전 고등학생 때쯤인 것 같다.
일기를 쓰지 않는 데에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다. 어중간한 성실함 때문에 며칠 쓰다 멈추는 미래의 내가 쉽게 보인다. 다음으로 또 중요하게, 조금 복잡한 이야기일 수 있지만, 나는 어느샌가 논문을 쓰든 끄적거리든 내 글이 다짐이나 긍정의 힘을 암시하며 끝나지 않기를 바라 왔다. 초등학교 때 쓴 일기만 해도 그 마무리는 항상 “내일부터는 하루를 더 알차게 만들어야겠다.”라든가 “주변 사람들에게 더 다정한 사람이 되어야겠다.”라는 투의 문장이 적혀있었던 것 같다. 하지만 대학에서 사회과학을 전공하며 나는 점차 자기 긍정의 신화에 반기를 들기 시작했다. 그리고 약속과 결심이라는 이름으로 몸과 마음을 지배하는 일련의 것들을 찾아냈다.
그래서 전교 1등에 대해 석사논문을 썼다. 전교 1등이었던 내가 보기에, 우리 주변의 1등들은 너무 쉽게 다짐과 자기 긍정의 아이콘으로 불리고 있었다. 전교 1등이라는 단어를 포털에 검색하기만 해도 등장하는 가지각색의 공부법은 사실 ‘공부하는 방법’을 뜻하지 않았다. 그건 일과 법과도 같았는데, 어떻게 하루를 재단하고 사용해야 하는지, 그리고 오늘과 다가올 날들에 대해 어떤 마음을 가져야 하는지를 담고 있었기 때문이다. 특히 우리 주변에 많은 현자들은 긍정의 믿음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그들은 ‘할 수 있다’라든가 ‘잘 될 거야’와 같은 주문의 되뇜이 원하는 결과를 가져올 것이라 확신했다. 지치고 무기력할 틈 없이 ‘웃으면 복이 온다’는 일념 하에 ‘아프니까 청춘’은 고통의 시간을 견뎌야 한다고 주장했다.
나도 그 나만의 일과 법 만들기에 미쳐있었다. 고등학교 시절까지만 해도, 나는 도돌이표처럼 돌아오는 시험 고난 주간마다 스스로를 믿어보자며 불안한 마음을 달랬을 것이다. 매년 올해는 일기를 써보겠다며 다 쓰지도 못할 플래너나 다이어리도 샀을 것이다. 역시나 며칠 가지 못했겠지만. 추측컨대, 이미 이 세상에 없을 다이어리에는 이런 내용이 쓰여있을 것이다. ‘나는 원하는 대학에 들어갈 것이다. 그때까지만 조금 더 힘을 내보자.’ 하지만 실제로 대학에 들어간 이후로, 나는 점차 자기 관리와 자기 긍정의 힘에 반항하기 시작했다. 나는 지금의 날 버티게 했던 그 힘이, 정말 나를 올바른 방향으로 나아가게 했는지 의구심을 가졌다. 그래서 석사를 시작한 지 두 학기도 채 지나지 않아 논문의 주제를 정했고, 지도교수님께 전교 1등의 ‘진짜’ 이야기를 듣고 싶다고 말씀드렸다. 나는 내 동지들에게 묻고 싶었다. “우리 계급장 다 떼고 얘기해보자. 그래서 그렇게 살아본 경험이 지금 우리에게 어떤 영향을 미치는 거니? 마음에 드니? 좋거나 별로인 점은 뭐니?”
대학 이후로 나는 단 한 번도 일기를 쓰지 않았다. 나는 일기가 어느 순간 ‘결국 너는 이게 더 필요해.’라는 자기 암시를 외치는 대나무 숲이 될 것임을 눈치챘다. 울리는 메아리는 나를 더 옥죌 거라고 여기면서. 나는 ‘긍정’이라는 단어에도 굉장한 알레르기를 키워왔다. 잘은 모르지만, 주피의 세포들이라는 만화가 그려진다면 굉장한 악플을 받을 수도 있다. “세포들이 하나도 귀엽지가 않아요. 다들 긍정적인 생각은 내치려고 하는걸요!”
석사논문에 자리한 내 뮤즈들의 수많은 문장 중에서, 가장 마지막으로 쓰인 건 다윤의 말이다. 부연설명을 하자면 다윤은 네 명, 아니 나를 포함한 다섯 명의 연구 참여자 중 가장 성공적인 삶을 살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그는 한국 최고의 대학에 최고의 과를 들어갔고, 원하는 시험을 척척 붙어내며, 원하는 직장도 척척 합격해서 재직 중에 있었다. 물론 그 나름대로 마주해온 크고 작은 실패라고 불릴 것들이 있겠지만.
언제부턴가 ‘할 수 있어’라는 말을 듣기 싫었어요.
나는 다윤의 말로 논문을 마무리하며 세상에 외치고 싶었다. “이것 보세요. 긍정의 힘이 다 통하는 게 아니라니까요? 긍정적이자느니 힐링하자느니 우리 이제 그만 얘기합시다.” 그리고 다윤이 제기한 자기 긍정에 대한 의심이 수많은 엄친딸과 엄친아들에게 자라나고 있는 변화의 싹이 아닐까 생각했다. 긍정에 대한 부정이 긍정이 되는 오묘한 마무리. 고민이 없었던 건 아니다. 마음 편하게 “여전히 바뀐 건 하나도 없더군요. 저만해도 학점이니 대외활동이니 봉사니 열심히 살잖아요? 자기 관리의 현신이지요.”라고 말하며 비-판적인 끝맺음을 할까 고민하기도 했다. 하지만 결국에는 우리네 전교 1등들이 발버둥 치고 있다는 걸 어필하고 싶은 마음이 이겼다. 나는 내 논문에 자신이 있었다. 석사생만이 가질 수 있는 치기어림이 논문에 서려있다고 생각했다.
요새 알고리즘이 나를 자꾸 유튜버 이연 님으로 이끈다. 나 같은 상태의 사람을 이끄는 제목을 만드는 게 그의 엄청난 재능인 것 같다. 운 좋은 사람이 되는 방법이라든가 애매한 재능으로 충분히 성공하는 방법이라든가. 제목에 꽂혀 들어가면 사실 영상을 보고 듣고 있는 시간이 너무나 고통스럽다. 그가 무심한 듯 읊조리는 삶의 지혜에 대한 거부반응이 표면적인 이유고, 내용을 귀담아 들었을 때 나는 그런 사람이 아니라는 것이 이면의 원인이다. 그에게서도 비슷한 말이 들린다. 긍정의 힘이라든가, 감사의 마음을 가지라든가.
다만 오늘부터 그 고통의 시간을 조금 더 버텨보려고 하는 건, 자기 관리와 긍정에 대한 강한 반발심으로 인해 필수 불가결한 정도의 긍정마저도 밀어내고 있던 것은 아닐까 생각했기 때문이다. 나는 긍정의 힘을 애써 마음에서 밀어내려고 했다. ‘긍정적이려고 하지 마. 애쓰지 마.’라고 스스로에게 주문을 되뇌면서. 어제 ‘배움의 발견’이라는 책에 대해서 썼다. 짧은 글이라도 탈고하고 나면 몇 번에 걸쳐 다시 읽는 습관이 있는데, 그 글도 같았다. 읽고 또 읽다 문득 글 안에서 나를 봤다. 글 속에서 나는 꽤나 자신감도 잃고 스스로에 대한 믿음을 잃은 사람이었다. 나는 말과 글에서 긍정적인 기운이 조금이라도 뿜어져 나오는 걸 경계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것은 역설적으로 스스로에게 또 다른 관리를 요구하는 나를 만들고 있었다. 너무 긍정적이어서는 안 될 것. 스스로를 너무 믿어서도 안될 것.
“나에게 더 여유를 주기 시작한다”며 비건을 쉬고 있다는 이하늬 배우의 말처럼, 나도 이제 스스로에게 공간을 좀 주려고 한다. 20대의 내가 자기 관리와 긍정에게서 벗어나려고 발버둥 쳤다면, 30대를 앞둔 나는 이제 긍정의 기운과 적절한 거리를 유지하며 친해져보려고 한다. 그래서 나는 일기가 아닌 브런치를 쓴다. 브런치를 통해 나는 내 생각과 감정을 정리한다. 어쩌다 이 공간에 들릴 누군가와 연결되기를 바라면서. 그런 오늘의 브런치는 긍정의 기운이 가득한 다짐으로 마무리해본다.
나는, 그리고 우리는, 잘 될 것이다.
나는, 그리고 우리는, 잘하고 있다.
나는, 그리고 우리는, 애매해 보일 수 있지만 나름의 재능을 가진 적어도 하나씩은 가졌다.
나는, 그리고 우리는, 어떤 방식으로든 이왕이면 빠른 시일 내에 자기 자리를 찾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