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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소머 Jan 12. 2021

피드백포비아 신입사원이 속으로 외우는 주문

피드백받기 전엔 엉덩이에 힘을 꽉 주자


 그래, 인정하기 어려웠지만 이제는 인정해야겠다. 나는 피드백이 싫다. 정확히 말하면 '부정적인 피드백을 받는 순간'이 너무 싫다. 프로젝트가 생기고, 결과물을 뚝딱뚝딱 만들어서 팀장님에게 피드백을 요청한다. 입사 초창기에는 "어머! 무고님 이런 능력도 있었어요?" 하고 부둥부둥 둥가 둥가 곱게 길러졌던 시기도 있었던 것 같은데. 좋은 날 다 갔다. 지금은 우리 시골집 개도 안 먹는 3일 된 찬밥신세. 좋은 피드백이 올 때도 있지만 아주 가끔이다. 그리고 한 번에 컨펌되는 경우는 없다. 피드백 시간은 대부분은 "이 부분은 이렇게, 저 부분은 저렇게 수정해주세요" 같은 말들로 채워진다.


 얘길 들어보면 틀린 말은 별로 없다. 하지만 머리 굴려가며 열심히 만든 결과물이 남 앞에서 발가벗겨진 채 요리조리 평가당하는 일이 내겐 좀 힘들다. 내 몸은 한 개고 일정은 늘 빠듯하다. 주어진 시간과 자원 안에서 바꿀 수 있는 건 내 노력뿐이라, 그냥 내 몸 갈아 넣어 만들었는데 부족한 부분을 콕콕 집어냄 당할 때는 마치 나 스스로가 부족한 사람인 것처럼 느껴진다.


 초반엔 피드백받는 과정이 많이 힘들었다. 열심히 만들고 → 피드백받고 → 수정했는데 → 또 수정해야 하고 → 또 피드백받고 → 겨우 컨펌받고... 이런 와중에  다행인 건, 1년 정도 회사를 다니며 계속 듣다 보니 맷집이 늘었다는 거다. 부정적인 피드백을 받는 순간과, 끊임없는 수정사항을 놓치지 않고 겨우 적어 내려가는 순간을 대처하는 스킬도 몇 개 생겼다. 그 스킬들을 이야기하려고 한다.


 우선 피드백을 받기 직전에 마음을 먹는다. '지금부터 피드백이 시작될 건데, 절대 한 번에 오케이 나지 않을 거야. 수정할 것들이 나올 거고, 어쩌면 부정적인 피드백을 받을 수도 있겠지'하고. 모르고 뚜들겨 맞는 것보다는 맞을 걸 미리 알고 엉덩이에 힘 빡 주고 들어가는 게 덜 아프다.


 피드백이 시작되고 나면 우선 경청한다. 할 수밖에 없다. 내 작업물에 대해 이야기하는 시간이니까. 단어를 고르는 사이에 생기는 잠깐의 정적이라던지 작업물을 보는 팀장님의 표정이라던지 그런 게 내 머릿속을 가득 채운다. 다른 생각은 들어올 겨를이 없다. 그나마 재택근무 중이라서 피드백받을 때 팀장님 표정이 안 보여서 다행이다. 실시간으로 일그러지는 내 얼굴도 들키지 않을 수 있어서 거듭 다행이다.


 중요한 건 '내가 만든 것'과 '나'를 분리하는 거다. 나는 어릴 적부터 평가에 대한 두려움이 컸다. 특히 내가 만든 것에 대해, 아니면 내 성격에 대해, 외모에 대해 평가당하는 게 끔찍이도 싫고 무서웠다. 주제넘는다고 느끼기도 했다. 사람 따위가 어떻게 감히 사람을 평가해(?). 많은 평가를 당하거나 지적받은 건 별로 없었고 평가를 받아서 괴로웠던 순간이 떠오르는 것도 아니니 트라우마 때문은 아닌 것 같다. 그냥 이렇게 타고났나 보다.


 하지만 회사에서는 끊임없이 평가를 당한다. 내가 원하든 원하지 않든. 프로젝트에 대한 소소한 평가도 있고, 내 연봉이 결정되는 연말평가도 있다. 나는 내 발로 지옥에 기어들어온 거다. 하지만 어쩌겠나? 나는 돈이 없고, 회사는 나에게 돈을 준다. 그래서 이 피드백 시간을 견디기 위해 몇 개의 주문을 만들었다.


 '이건 내 작업물에 대한 피드백이지, 내 존재에 대한 피드백이 아니야', '지금 듣고 있는 말들은 그냥 이 자료에 대한 말들이야', '내 존재를 수정하라는 게 아니라 이 자료의 내용을 수정하라는 것뿐이야', '이건 나에 대한 공격이 아니라 내 자료를 더 업그레이드하기 위한 조언이니 기분 나빠할 필요 없어'. 이런 주문들을 되뇌며 그 시간을 견딘다.


 그러다가 깨닫는다. 나는 너무 버거운 업무를 지시받으면 화부터 나는구나. 이 시간 안에 이걸 어떻게 하라는 거지? 하고 단전부터 분노가 차오른다. 그 뜨거운 기운을 혀 아래에 감추느라 잠깐 입을 다문다. 어떤 말을 해도 이 자리에서는 핑계가 된다. 만들어내야 하는 결과물에 비해 시간이 얼마나 촉박했는지, 이걸 해내기 위해 얼마나 노력했는지, 구구절절 말하면 결국 내가 비참해진다는 걸 이젠 안다. 그래서 또 입을 꾹 다물고 다시 한번 주문을 외우고 겨우 "알겠습니다"를 내뱉는다.


 그리고 피드백이 끝나면 그 기분을 떨쳐버리려고 애쓴다. 피드백 끝났어! 더 생각하지 말고 빨리 수정해서 끝내버리자. 어차피 먹을 욕 다 먹었고 이제 더 안 들어도 되니까 후련해하는 게 맞는 거야, 하며.


 필요 이상으로 까칠한 피드백을 받은 날에는 '팀장님 오늘 기분 나쁜가 보다. 근데 왜 나한테 화풀이야 어이없엉. 에휴 나한테 화내는 거 아니니까 신경 쓰지 말자'하고 까먹으려고 한다. 그냥 아무 일 없던 듯이 일하다 보면 실제로 금방 까먹는다. 나이 들수록 기억력이 나빠져서 참 다행이다.


 이렇게 혼자 주문 중얼거리고 다독이고 까먹으려고 노력하는 모습이 어떻게 보면 안쓰럽기도 하겠다. 녀석, 월급을 위해 자기를 속이고 갉아먹는구나. 근데 나는 나를 불쌍하게 여기고 싶지 않다. 그래서 그냥 세상 탓을 한다. 먹고살기 힘든 세상이라 나도 그 속에서 깎여가는 것뿐이구나.


 작년엔 나를 깎아가며 일한다는 것에 상처 받기도 했다. 올해 들어 달라진 게 있다면, 좀 깎이면 어때. 그런다고 내가 영영 사라지는 것도 아닌데 하고 마음을 고쳐먹었다. 그렇게 깎이다 보면, 어쩌면 더 예쁜 모양이 될 수도 있고. 나는 이렇게 변해간다. 여러 의미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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