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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소머 Jan 17. 2021

필사란 무엇인가

스스로 깜지 쓰기

 자신만의 시간표를 만들어 부지런히 살고 또 부지런히 노는 부러운 친구가 있다. 그 친구가 필사를 하고 있다는 얘기를 들었다. 필사? 그게 재미있을까? 의미 있을까? 가끔 좋은 시를 발견하면 내 일기장에 옮겨 쓰기도 하고, 읽은 책 중 특히 마음에 드는 구절은 블로그에 문장 단위로 남겨두긴 했었지만 글 전체를 베껴 쓰는 일에는 통 관심이 가지 않았다. 하지만 친구가 좋다고 하니 일단 필사라는 키워드를 머릿속에 넣어두었다.


 그리고 오늘. 12월 말부터 지금까지 글을 너무 쓰지 않아서 조급한 마음이 커졌다. 적어도 일주일에 두 편은 써야 하는 거 아닌가? 요즘 바빠서 밤 열 두시까지 일하고 다음 날 눈 뜨자마자 일하고 또 주말에도 일하긴 하지만 그런 거 감안해도 일주일에 한 편은 써야 하지 않을까? 너무 오랫동안 안 쓰면 다시 쓰기 힘들어질 텐데.


 뭐라도 쓰자 싶어서 브런치를 켰다. 사실 일해야 하는데 너무 하기 싫어서 글쓰기로 도피한 거다. 이유는 불순하지만 어쨌든 글을 쓰기로 마음을 먹었으니 기특하게 여겨주길 바란다. 빈 화면에 커서가 깜빡인다. 머리에 뭔가 있긴 있는 것 같은데 도저히 꺼내지지 않는다. 뭔가 있다는 건 나만의 착각인지도 모르겠다. 사실 아무것도 없는 걸지도.


 아니다. 사실은 지금 나를 지배하는 생각이 있다. 단순히 있다는 말을 넘어서, 너무 확고하게 존재한다. '일하기 너무 싫다'. '이번 프로젝트 끝나면 연차 이틀 쓰고 쉬어버리겠다'. 하지만 이걸 글로 쓸 수는 없다. 이 프로페셔널한 브런치라는 곳에 겨우 두 문장으로 이루어진 글을 발행할 수는 없다. 시도 아니고.


 글다운 글을 쓰고자 작가의 서랍에 들어가 본다. 한두 문단 쓰다 만 글들이 자기 차례를 기다리고 있다. 하나씩 눌러봐도 딱히 끌리는 글감이 없다. 그냥 조용히 서랍에 넣어두기로 한다.


 이대로 물러설 수는 없다. 이미 무슨 글을 쓸지 고민하다가 포기하고 드러누운 밤들이 숱하다. 구글 킵(메모 프로그램)에 들어가 본다. 그냥 흘려보내기 아쉬워서 급하게 적어둔 생각들이 모여있다. 메모는 몇십 개가 넘지만, 하나의 글로 만들기에는 할 말이 모자라거나 지금 쓰고 싶지 않은 주제들 뿐이다. 너희들이 킵에만 머무르는 이유가 있었어. 그러게 생각났을 때 바로바로 글로 써버릴걸 그랬다. 메모로만 미뤄두면 하기 싫은 숙제가 돼버리니까.


 바로 그때 필사가 떠올랐다. 그래, 내 글 못 쓰겠으면 남의 글이라도 베껴보자. 친구의 필사 전도 당시, 떠올랐던 작가님이 있었다. 바로 김영민 교수님이다. 몇 년 전에 '추석이란 무엇인가'라는 글로 입덕 해서 다른 칼럼도 찾아보고, 교수님 개인 홈페이지도 즐겨찾기에 추가했었다. 담담한 문체로 빵빵 터지는 개그를 날리신다. 그냥 재밌게 보고 났는데 왠지 조금 더 똑똑해진 느낌도 든다. 칼럼계의 개그맨이라고 해야 할까. 전도연을 닮았는데 가방 끈이 길고, 그런데 똑똑한 척 안 하면서 웃긴 글을 잘 쓰는 개그맨. 나도 그처럼 재미있는 글을 쓰고 싶었다.


 일기장으로 쓰려고 샀는데 생각보다 줄 간격이 좁은 바람에 구석에서 먼지 쌓여가고 있던 몰스킨 노트를 꺼냈다. 볼펜으로 휘갈기기보다는 연필로 사각사각 쓰는 게 느낌이 더 좋을 것 같았다. 어디서 주워듣고 산 블랙윙 연필은 침대 맡에 두고 쓰다가 깔아뭉갠 덕분에 심이 부러진지 오래였다. 아빠 책상에 있던 커터칼을 훔쳐와서 연필을 깎았다. 나는 연필 깎을 때 왜 이렇게 손마디가 아픈지 모르겠다.


 글씨를 예쁘게 쓰기 위해 노력하지 않기로 다짐하며 아이패드에 '추석이란 무엇인가'를 띄워놓고 필사를 시작했다. 글씨 모양을 신경 쓰다 보면 그것 때문에 더 스트레스받고, 시간도 너무 오래 걸리고, 그리고 어차피 예쁘게 못 쓰기 때문이었다. 결론적으로 이건 아주 잘한 다짐이었다. 글씨 한 글자 한 글자 따로 떼어놓고 보면 엉망이었지만 빼곡하게 모아놓으니 그렇게 자세하게 보이지 않았다.


 예상대로 연필 사각거리는 소리와 느낌이 참 좋았다. 사각사각. 사각사각. 지금 옮겨 쓰고 있는 글에 대한 생각들이 잡생각을 몰아냈다. '교수님 이 부분 쓰시면서 솔직히 본인도 빵 터지셨겠는데?', '이 글에 등장한 친구분과는 아직도 사이좋게 지내실까?', '옮겨 적는 데에도 이렇게 시간이 들면, 처음 이 글을 쓰는 데에 걸린 시간은 얼마나 길까? 이 정도의 글을 엄청 빨리 쓸 수 있다면 그건 정말 천재겠지. 부럽다.', '역시 아는 게 있어야 그걸 글로 쓸 수 있구나.' 이런 생각들이 후루룩 지나갔다.


 그리고 글이 딱 두 페이지를 채워서 쾌감을 느꼈다. 모자라지도, 넘치지도 않게 딱 두 페이지로 떨어지다니. 난 좀 이런 쓸데없는 데에 강박이 있다는 걸 새삼 깨달았다. 강박 갖지 말고 넘치면 다음 페이지에 마저 쓰면 돼, 그리고 그 밑에 다음 글 필사하면 되지 뭐, 이렇게 생각하려고 노력했지만 글이 애매한 곳에서 끝나면 분명 찝찝했을 거다.  


 첫 필사의 경험은 기대했던 것보다 좋았다. 필사라는 단어에서 느껴졌던 비장함, 아주 신성한 작업이라는 부담감이 다 날아갔다. 자진해서 깜지를 써도 좋을 만큼 마음에 쏙 드는 글을 내 손으로 직접 써보는 것, 그게 필사였다. 필사에 대한 부담이 사라졌다.


 필사를 해보니 좋은 점이 많다. 더 하다 보면 나도 이렇게 좋은 글과 닮아갈 수 있지 않을까, 그런 희망이 생긴다는 것. 그 글과, 그리고 작가와 더 가까워졌다는 느낌이 든다는 것. 하다 보면 잡생각이 사라지고 글에만 집중할 수 있다는 것. 무엇보다 좋은 점은, 내 글을 쓰고 싶은 욕구가 생긴다는 것. 나도 이렇게 좋은 글을 써야겠다는 자극을 받는다는 것. 앞으로도 글이 써지지 않을 때는 필사를 해야겠다. 거기서 글감을 건질 수도 있고 아니면 아예 새로운 내 글을 시작할 수 있는 실마리가 되어줄 테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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