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퍼(Phở) 한 그릇에 녹아든 베트남의 정체성

프랑스와 중국, 그리고 베트남의 문화 융합

by 한정호

오늘 아침 퍼(Phở) 한 그릇을 먹고, 길거리 카페에서 카페 다(아이스커피)를 한 잔 하면서 하루를 평화롭고 느슨하게 시작하였다. 쌀을 주식으로 하는 국민이 어떻게 이렇게 국수를 만들고 자신들의 대표 음식으로 자리매김할 수 있도록 만들었을까? 라는 의문이 생겼다.


사실, 쌀국수는 베트남의 주식이 아니다.

그럼에도 이 음식은 이 나라의 정체성과 개방성을 가장 잘 보여주는 상징이다. 그래서 오늘도 전 세계 사람들은 퍼 한 그릇에서 ‘베트남의 향기’를 느낀다.


1. 프랑스와 중국이 빚어낸 혼혈 요리

쌀국수(Phở)의 뿌리는 19세기 말, 프랑스 식민지 시절 북부 베트남, 특히 하노이 근교에서 시작됐다. 당시 프랑스인들은 ‘포트오푀(Pot-au-feu)’ 라는 쇠고기 스튜를 즐겼고, 중국 이민자들은 면 요리 문화를 전했다. 그 영향 속에서 베트남 사람들은 쇠고기 뼈를 오래 끓여 국물을 내고, 밀 대신 쌀로 만든 국수를 넣은 새로운 음식을 만들어냈다. 그 이름이 바로 ‘Phở(퍼)’다.

즉, 프랑스의 육수 + 중국의 면문화 + 베트남의 쌀. 이 세 가지가 만나 한 그릇의 세계 음식이 태어난 셈이다.


2. 북부의 ‘퍼보(Phở Bắc)’, 남부의 ‘퍼남(Phở Nam)’

쌀국수의 고향은 북부 하노이이다. 하지만 1954년 제네바 협정 이후, 북쪽 사람들이 남쪽으로 이주하면서 퍼는 새로운 변화를 맞았다.

기후가 따뜻하고 식재료가 풍부한 남부에서는 단맛이 강해지고, 허브·숙주·고추·라임 등이 듬뿍 들어가 화려한 맛으로 발전했다. 반면 북부의 퍼는 심플하고 국물 중심이다. 그랬던 것이 남부로 전해지면서 향신료와 채소가 풍성한 스타일로 변모하기 시작한 것이다.

같은 ‘퍼’라도 지역에 따라 맛과 향이 완전히 다르다. 그래서 베트남 여행자들 사이에서는 '하노이의 퍼는 국물 맛으로, 호치민의 퍼는 향으로 먹는다'는 말이 생겨났다.


3. 베트남 사람들은 퍼를 얼마나 먹을까?

의외로, 베트남 사람들은 매일 밥(Cơm)을 먹고, 가끔 퍼를 먹는다.

대부분의 베트남 가정에서 하루 세 끼의 기본은 ‘쌀밥’이다. 퍼는 아침식사, 야식, 혹은 손님 대접용으로 즐기는 음식이다.

출근길에 길거리 포장마차에서 퍼 한 그릇을 후루룩 먹는 풍경은 흔하지만, 집에서 직접 끓여 먹는 경우는 드물다. 그 이유는 간단하다.

국물을 내는 데 시간이 오래 걸리고, 재료가 복잡하기 때문이다. 쇠고기 뼈, 향신료, 양파, 계피, 정향, 팔각 등, 이 모든 걸 몇 시간씩 고아야 비로소 ‘퍼의 향기’가 완성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퍼는 집밥이 아니라 ‘외식용 음식’, 즉 한국의 설렁탕이나 칼국수처럼 밖에서 사 먹는 음식으로 자리 잡았다.


4. ‘국민음식’이 된 이유

퍼는 베트남 사람들의 일상식은 아니지만, 세계가 베트남을 기억하는 가장 대표적인 음식이다.

전쟁 이후 해외로 이주한 베트남 사람들은 새로운 땅에서 식당을 열며 ‘Phở’를 알렸다. 그 덕분에 퍼는 전 세계로 퍼져 나갔고, 이제는 '베트남=쌀국수'라는 등식이 자연스럽게 굳어졌다.

쌀국수는 결국 한 나라의 음식을 넘어, 베트남의 역사와 정체성, 그리고 문화적 자존심을 담은 상징이 된 것이다.


쌀국수 한 그릇에는 식민지의 아픔, 전쟁의 이주, 그리고 문화의 융합이 함께 담겨 있다. 그래서 퍼는 단순한 음식이 아니라 '세계 속에서 베트남이 스스로를 증명한 이야기'가 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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