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흰옷의 나라에서 만난 마음의 색

비움의 미학 : 한국과 베트남이 흰색을 좋아하는 이유

by 한정호

순수와 절제, 그리고 공동체의 미학


베트남 거리의 옷가게를 보면 흰색 옷이 유난히 많다. 결혼식 예복, 학교 교복, 교회 행사, 심지어 제사 때 입는 옷까지. 한국과 베트남 사람들은 모두 ‘흰색’을 조금 더 특별하게 여기는 듯 하다. 그 이유는 단순히 밝고 깨끗해서가 아니라, 이 색에 담긴 정신이 있기 때문이다.


1. 흰색은 ‘비움’의 색이다

한국에서 흰색은 예로부터 ‘비움과 절제’를 상징했다. 조선시대 사람들은 대부분 흰옷을 입었고, 서양인들은 우리를 '백의민족'이라 불렀다. 그 이유는 단순히 염색 기술이 부족해서가 아니라, ‘꾸밈보다 본질’을 중시하는 정신 때문이었다.

하얀 옷은 때가 타기 쉽다. 그래서 늘 깨끗이 관리해야 한다. 그건 단지 위생의 문제가 아니라 ‘마음을 닦는 일’이었다. 매일 새 옷처럼 살고자 하는 마음, 바로 그게 흰색의 미학이었다.


2. 베트남에서도 흰색은 ‘정결과 겸손’의 상징이다

베트남 학생들의 교복을 보면 대부분 흰색이다. 특히 여학생의 아오자이는 흰색으로 통일되어 있다. 이 흰색은 ‘순수함과 예의’를 상징한다. 더운 나라임에도 불구하고 흰색을 고수하는 이유는 ‘사회적 질서와 조화’를 중시하는 문화적 가치 때문이다.

또한 베트남 불교 문화에서도 흰색은 중요한 의미를 가진다. 불자들이 절에서 입는 의복은 회색이나 흰색에 가깝다. 욕망을 덜어내고, 마음을 깨끗이 비우겠다는 의미다. 그래서 흰색은 단순한 색이 아니라 수행의 색이기도 하다.



3. 슬픔과 죽음의 색이기도 하다

동아시아 문화권에서 흰색은 ‘죽음’과도 연결된다. 한국에서 상복은 흰색이고, 베트남에서도 장례식장은 흰 천으로 장식된다. 죽음을 ‘끝’이 아닌 ‘정화의 과정’으로 보는 시각 때문이다. 검은색이 슬픔을 감추는 색이라면, 흰색은 슬픔을 드러내며 씻어내는 색이다.

그래서일까? 한국과 베트남 사람들은 눈물의 자리에서도 흰색을 입는다. 그건 슬픔을 감추지 않겠다는, 그리고 다시 태어날 준비를 하겠다는 선언이기도 하다.


4. 현대의 흰색 : 미니멀리즘의 귀환

요즘 젊은 세대의 옷장, 집 인테리어, 카페 인테리어를 보면 다시 흰색이 중심에 서 있다. 과거의 절제와 단아함이 ‘미니멀리즘’이라는 이름으로 돌아온 것이다. 하얀 벽, 흰 컵, 흰 티셔츠. 그 속에서 사람들은 ‘정리된 마음의 평화’를 찾는다.


한국과 베트남 모두 빠르게 변하는 세상 속에서 여전히 흰색을 통해 ‘단순한 행복’을 찾으려는 듯하다. 한국과 베트남은 언뜻 다르지만, ‘비우고, 깨끗하게, 본질로 돌아가려는 마음’에서는 닮아 있다. 흰색은 그 마음의 색이다. 화려한 색들 사이에서도 묵묵히 빛나는 이유가 바로 거기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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