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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의가 권리로 변하는 베트남 사회

정이 당연함으로 변하는 순간의 기록

by 한정호

베트남의 미소 뒤에 숨은 진짜 거리감 : 정을 주면 당연해지고, 침묵하면 권리가 되는 곳에서


어제 저녁, 또 한 번 직원의 태도에 화가 났다.

평상시 손님들이 오시면, 서비스 직원 한 명이 정신없이 일하는 모습이 안쓰러워 테이블 청소부터 설거지까지 도와주고 있었다. 그런데 어제는 쇼케이스에 맥주와 음료가 비어 있는 걸 보고 내가 직접 채워 넣고 있는데, 정작 그 직원은 다리를 꼬고 앉아 핸드폰을 보고 있는 것이 아닌가! 참다 못해 불러 세워 물었다. “난 지금 너를 도와주고 있는데, 네가 해야 할 일을 하지 않고 놀고 있으면 어떻게 하겠다는 거야?” 그러자 돌아온 반응은 늘 그렇듯, “뭐라구요?”였다.

칭찬할 때는 그렇게 잘 알아듣던 베트남어가, 지적을 하면 못 알아듣는 언어가 되어 버린다. 결국 손짓으로 직접 지시하자 그제야 마지못해 움직였다. 그날 저녁, 나는 일체의 도움을 주지 않았다. 결국 그녀는 매장 청소부터 설거지, 마감까지 혼자 해내야 했고, 평소보다 훨씬 늦게 퇴근했다.

'이제야 조금은 깨달았을까?'

아니, 아마도 이틀쯤 지나면 다시 그 자리에 앉아 예전처럼 핸드폰을 만지작거리며 있을 것이다.


웃음 뒤의 진짜 베트남

베트남에 처음 왔을 때, 길거리에서 환하게 웃으며 “Hello!”를 외치던 사람들을 보며 생각했다.

‘이곳은 편안하게 살 수 있는 곳이겠다.’

아이들이 엘리베이터 안에서 수줍게도 당당하게 “Where are you from?”이라 묻는 그 질문이 밉지 않았다. 매장에서도 예쁘게 차려입은 아이를 보면 다가가 말도 걸고, 엄마는 미소 지으며 “안아봐요”라며 아이를 내게 맡겼다. 그 모든 따뜻한 순간들이 나를 이곳에 머물게 만들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그 웃음 뒤에 숨은 현실을 조금씩 보게 되었다.

'사장님이 챙겨주는 건 당연하다.'

'배려는 이용해 먹을 수 있는 수단이다.”

이런 생각이 직원들 사이에 너무 자연스럽게 자리하고 있다는 걸 깨닫게 되었다.


정직보다 교묘함이 우선되는 현장

딸 같은 나이의 매장 매니저가 있었다. 평일 아침마다 학원에 다녀서 오후 근무만 가능하다고 했다. 그래서 인센티브를 주며, “우리 함께 회사를 키워보자”고 격려했다. 그런데 두 달쯤 지나자 “12시에 출근해서 8시에 퇴근하면 안 될까요?”라고 하는 것이었다. 관리자는 오픈이나 마감을 맡아야 한다고 말하자, 힘들어서 못 하겠다고 했다. 결국 근무 시간엔 앉아서 시계를 보며 하루를 보내고, 내가 있을 때만 억지로 움직이는 척 했다.

휴가 처리에서도 기가 막혔다. 가족일로 쉬게 해주었는데, 근무했다고 보고를 올렸다. 이를 지적하자 “지난번엔 쉬게 해주고 휴무처리 안 했잖아요”라며 따진다. 당당함의 방향이 너무 이상하다. 이전의 배려를 현재의 당연한 권리로 생각하는 것이다.


호의는 권리가 된다

월요일 아침, 늘 하던 대로 매장 정리를 마치고 청소 아주머니들에게 음료를 건넸다. 그중 한 명이 알로에는 싫다며 ‘아침햇살’을 달라고 한다. 장난스레 모른 척하자, 이번엔 당당하게 “그거 말고 저걸로요”라며 손가락으로 가리킨다.

순간 화가 치밀어 “됐다, 가요”라고 손짓했다. 들어와 앉으니 후회가 밀려왔다.

‘그냥 달라는 걸 주면 될 걸, 왜 이렇게 마음이 좁았나.’

하지만 곧 또 다른 생각이 들었다. ‘감사할 줄도 모르는 사람에게 호의를 베푸는 건, 결국 나를 지치게 만드는 일 아닌가!’


보너스가 아닌 ‘권리’

베트남의 13개월째 월급 문화도 비슷하다. 원래는 연봉제의 중간 정산, 일종의 퇴직금 개념인데, 이제는 “당연한 보너스”가 되어 버렸다. 퇴직할 땐 또 따로 퇴직금을 요구한다. 심지어 13개월 월급을 받고도 “보너스는 또 주셔야죠”라고 말하는 직원도 있다.


익숙해진 ‘과한 대접’

한국인 주재원과 관광객들이 만들어낸 팁 문화의 왜곡도 있다.

'한국인한테는 더 받아야 정상이다.' 이상한 권리가 형성됐다.

한국인들이 “이 정도는 아무것도 아니다”라며 과하게 주는 팁이 결국 베트남 사람들의 ‘기준’을 바꿔 버렸다. 그건 호의가 아니라, 무너진 균형의 시작이었다.


인사의 힘, 그리고 도덕의 방향

그래서 나는 직원들에 작은 습관을 만들었다.

출퇴근 때 “반가워요”, “조심히 가세요”, 도움을 받으면 “감사합니다”, 실수를 하면 “죄송합니다.” 이 세 마디를 모든 직원들이 익숙하게 말하도록 하는 것이다. 사소한 것 같지만, 이게 안 되는 사회는 발전할 수 없다.


부자가 되려면, 가난한 도덕심을 버려라

어제의 일이 마음에 남아 있었는데, 우연인지, 필연인지 오늘 아침 故이병철 회장님의 조언을 설명하는 유튜브 영상을 보게 되었다.

“부자가 되려면 먼저 가난한 도덕심을 버려라.”

그 말이 가슴에 꽂혔다. 나를 살리는 도덕과, 나를 죽이는 도덕.

정도 사람을 죽인다. 베트남에서의 경험은 그걸 절실히 가르쳐 준다.


'정 주지 말고 거리를 두라.'

그 말이 이제 조금 이해가 된다. 하지만 그래도, 난 여전히 이 땅의 웃음을 믿고 싶다. 단지, 그 웃음 속에 ‘감사와 책임’이 함께 있기를 바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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