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의 ‘정’과 비교할 수 있는 베트남의 마음 단어들
한국을 설명하는 단어로 ‘정(情)’만큼 많이 쓰이면서도, 외국어로 번역하기 어려운 단어는 드물다.
사전적으로는 affection, attachment, kindness 정도로 옮길 수 있지만, 그 어느 것도 ‘정’을 온전히 설명하지는 못한다.
그렇다면 베트남에는 한국의 ‘정’과 비슷한 개념을 담은 단어가 있을까?
결론부터 말하면, 똑같은 단어는 없지만, ‘정’의 여러 얼굴을 나눠 담은 단어들은 존재한다.
1. Tình (띵, 情) : 감정이 쌓여 만들어지는 유대
베트남에서 ‘정’에 가장 자주 대응되는 단어는 Tình이다. 한자로는 '정(情)' 한국어의 ‘정(情)’과 동일한 한자다. 베트남어에서의 쓰임으로는 Tình cảm(감정), tình người(사람의 정), tình nghĩa(의리), Tình yêu(사랑) 등이 있으며, 사람 사이의 감정적 유대를 표현할 때 폭넓게 쓰인다.
하지만 한국의 '정(情)'과는 중요한 차이가 있다.
한국의 ‘정’이 시간, 공간, 상황을 넘나들며, 때로는 이유 없이도 남아 있는 감정이라면, 베트남의 Tình은 비교적 명확한 관계와 맥락 속에서 형성된다. 함께 겪은 사건, 도움을 주고받은 기억, 가족, 연인, 친구라는 구조가 분명히 있을 때 더 강해지는 것이다. 즉, 정은 “그냥 정이 간다”가 가능하지만
Tình은 “왜 정이 생겼는지”가 비교적 또렷하다.
2. Nghĩa (응이어, 義) : 관계에서 생기는 의리와 도리
한국의 ‘정’에는 마음뿐 아니라 의리, 책임, 도리가 섞여 있다. 이 부분과 가장 가까운 베트남 단어가 Nghĩa다. 한자로는 '義'인데 의리, 도리, 정의를 뜻하며, 마땅히 지켜야 할 관계적 책임을 의미하며, 한국어의 의(義) 와 같은 글자다.
베트남어에서의 쓰임으로는 Nghĩa tình (義情) : 의리에서 나온 정, Tình nghĩa (情義) : 정과 의리가 함께 있는 관계, Ân nghĩa (恩義) : 은혜와 의리 등의 단어가 사용된다.
베트남어의 Nghĩa는 감정보다 관계의 무게다. '좋아서'라기보다 '그 관계니까 지켜야 한다'는 의미로 사용된다. 즉 Nghĩa는 '마음이 있어서'라기보다 '그렇게 해야 하는 관계이기 때문에' 지켜지는 감정이다. 예를 들어, '은혜를 갚아야 한다.' '오래 함께했으니 외면할 수 없다.' '가족이니까 책임진다.' 라는 의미로 사용되는 것이다.
이런 감각은 한국의 ‘정’이 가진 무거운 층위와 상당히 닮아 있다. 한국의 정 중, '오래 함께해서 끊기 어려운 마음' '손해 봐도 외면 못 하는 관계' 등과 의미가 정확히 겹친다.
3. Thương (뜨엉, 傷) – 연민과 애정이 섞인 마음
베트남 사람들이 정말 자주 쓰는 말이 있다. “Thương quá” 직역하면 “너무 불쌍하다”, “너무 마음이 간다”에 가깝다. 하지만 실제로는 연민, 애정, 걱정, 보호 본능이 한데 섞인 말이다. 한자로는 상(傷)이다. 한자의 원뜻은 '상처' '다치다' '아프다' 이지만, 중국 고전이나 동아시아 문화권에서 ‘상처가 나서 마음이 아프다 → 마음이 쓰이다 → 연민’으로의 의미 이동이 있었다.
베트남어에서의 현재 의미로는 '불쌍히 여기다' '마음이 쓰이다' '애틋하게 여기다' '사랑하다 (구어에서 매우 많이 사용)' 등이며, Thương quá : 마음이 너무 쓰인다 / 정이 간다. Ba mẹ thương con : 부모가 자식을 사랑한다 등으로 쓴다.
한국식으로 옮기면, “정이 가서 마음이 아프다”라는 표현과 가장 가까운 순간들이 많다. 힘들어 보이는 사람에게, 아이나 어른을 향해 또는 정이 들어서 챙겨주고 싶을 때, 이 단어를 사용한다. 즉 Thương은 정(情)의 연민, 보호 본능 쪽을 담당하는 단어다. 하지만 Thương은 따뜻하지만, 동시에 약간의 거리도 남겨 둔다. 정처럼 깊이 엉겨 붙기보다는 지켜봐 주는 마음에 가깝다.
4. 한국의 ‘정’과 베트남 개념의 결정적 차이
한국의 정은 종종 이렇게 작동한다. '미워도 정 때문에 못 끊는다' '손해 봐도 정 때문에 봐준다' '이유 없어도 그냥 정이 있다'
하지만 베트남에서는 이 정도의 무조건성은 상대적으로 드물다. Tình, Nghĩa, Thương은 대체로 관계의 이유, 역할, 상황과 함께 움직인다. 그래서 관계를 끊을 때도 한국보다 상대적으로 명확하다.
한국의 정이 '엉겨 붙는 감정'이라면, 베트남의 정서 개념들은 '정리 가능한 감정'에 가깝다.
5. 그래서 베트남 사람들이 한국의 ‘정’을 특별하게 느낀다
베트남 사람들 입장에서, 한국인의 정은 때로 낯설다. '왜 저렇게까지 챙기지?' '왜 손해를 감수하지?' '왜 이미 끝난 관계를 계속 붙들지?' 라는 생각을 함께 할 때도 있다. 하지만 동시에 그 '무조건성'이 깊은 신뢰와 감동으로 남는 경우도 많다. 그래서 한국인은 베트남에서 종종 ‘정 많은 사람’으로 기억된다.
한국의 ‘정’과 정확히 일치하는 베트남 단어는 없다. 하지만 Tình은 감정의 유대, Nghĩa는 관계의 책임, Thương은 따뜻한 연민을 나타내는 단어들이 있으며, 이 세 단어를 겹쳐 놓으면 한국의 ‘정’과 상당히 닮은 그림이 완성된다.
문화는 단어 하나로 번역되지 않는다. 다만, 서로의 언어를 들여다볼수록, 우리는 왜 그렇게 행동하는지 조금 더 이해하게 된다.
베트남 직원들을 상대하는 지인들로부터 이런 말을 곧잘 듣곤 했다. "이 사람들은 정 줄 필요 없어!" "그렇게 정을 주고했는데 매몰차게 끝을 내는 걸 보면 정말 치가 떨린다" "정 주고 빰 맞는다는 말이 이 사람들에게 딱이야!"라는 말 들. 하지만 어쩌면 우리가 그들의 사고방식과 관계 문법을 모르고, 혼자 짝사랑을 해 놓고는 생색을 내거나 화를 낸 건 아닐까?
다음 글에서는 베트남 사람들은 관계를 어떻게 정의하고, 언제, 어떻게 관계를 정리하는지를 이어서 살펴보려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