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계를 지키는 것보다, 관계를 망치지 않는 것이 중요
한국에서 관계에 대해 이렇게 표현하곤 한다. “정이 들었다”, “사람 때문에 못 끊겠다”, “미워도 정이 남는다”....
하지만 베트남에서 관계는 조금 다르게 정의된다. 감정이 없어서가 아니라, 관계를 바라보는 기준 자체가 다르기 때문이다.
1. 관계는 ‘감정’이 아니라 ‘맥락’이다
베트남에서 관계는 '그 사람을 좋아하느냐'보다 '왜 그 관계가 생겼는가?'가 더 중요하다. '가족인가?' '일로 만난 사람인가?' '은혜를 주고받은 사이인가?' '잠시 스쳐가는 인연인가?' 등등. 즉 베트남에서 '관계'에는 처음부터 역할과 범위가 붙는다. 그래서 감정이 깊어져도, 그 역할을 넘는 기대는 조심스럽다.
한국처럼 “정이 들었으니 다 이해한다”는 논리는 베트남에서는 강하지 않다.
2. 관계는 ‘유지’보다 ‘조화’를 중시한다
한국은 관계를 오래 유지하는 것을 미덕으로 삼는다. 반면 베트남은 지금 이 순간의 조화를 더 중요하게 본다. 갈등이 생기면 정면 충돌보다는 회피하고, 문제를 당장 해결하기보다 시간에 맡기는 경향이 있다. 관계가 불편해지면 자연스럽게 거리를 조절하려 한다.
즉, 베트남식 관계는 붙들고 해결하는 구조가 아니라, 부딪히지 않게 흘려보내는 구조에 가깝다.
3. 관계는 ‘정리될 수 있는 것’이다
한국에서는 '이렇게 끝내는 게 맞나?'라는 고민이 길다. 하지만 베트남에서는 비교적 담담하다.
관계가 역할을 다하면, 자연스럽게 정리되는 것도 하나의 정상적인 흐름으로 받아들인다. 이건 차가움이 아니다. 관계를 억지로 끌고 가기보다, 각자의 삶을 존중하는 방식이다.
그래서 베트남 사람들은 관계의 시작도 빠르지만 끝도 상대적으로 명확하다.
4. ‘정’보다 ‘의리’와 ‘연민’이 분리되어 있다
앞서 이야기했듯, 베트남에는 한국의 ‘정’ 하나에 해당하는 단어가 없다. 대신 Tình(情) : 감정의 유대, Nghĩa(義) : 관계의 책임, Thương(傷) : 연민과 애정 이 세가지로 나누어 진다. 그래서 정 때문에 손해를 감수하거나, 미워도 관계를 유지하는 일은 한국보다 훨씬 적다.
감정이 끝났다면 Tình은 끝나고, 역할이 끝났다면 Nghĩa도 끝나는 것이다.
5. 관계의 깊이는 ‘말’보다 ‘행동’으로 판단한다
베트남 사람들은 말로 친함을 확인하는 데 큰 의미를 두지 않는다. 대신 본다. '정말 필요할 때 도와주는가?' '약속을 지키는가?' '말과 행동이 일치하는가?' 그래서 평소엔 담담해 보여도 결정적인 순간에 행동으로 나오는 관계는 오래 기억한다.
베트남 사람들에게 관계란, 붙잡아야 할 감정의 덩어리가 아니라, 상황과 역할 속에서 조화를 이루는 구조에 가깝다. 그래서 한국인의 눈에는 차갑고 매정해 보이기도 하고, 쉽게 정리하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하지만 그건 무정함이 아니라 관계를 다루는 방식의 차이다.
베트남에서 지내다 보면, 이 말을 이해하게 된다.
"관계를 지키는 것보다, 관계를 망치지 않는 것이 더 중요하다"
한국에서 관계란 대체로 유지해야 할 것이다. 한번 맺은 인연은 웬만하면 끊지 않고, 불편해도 참고, 손해가 있어도 버티며 이어 간다. 그 과정에서 ‘정(情)’이 관계를 붙잡는다.
하지만 베트남에서 관계는, 반드시 끝까지 지켜야 할 대상이라기보다 서로의 삶을 방해하지 않기 위해 조심스럽게 다뤄야 할 상태에 가까운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