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전의 한국과, 지금의 베트남
송년회 자리에서 들은 이야기 하나가 기억에 오래 남았다.
“그땐 아버지가 퇴근하기 전엔 밥을 안 먹었어. 아버지가 들어오셔야 꼭 같이 먹었지.”
나는 어른이 수저를 들기 전까지 먼저 먹지 않는 예절은 기억한다. 하지만 가족 모두가 저녁을 미뤄가며 기다렸다는 기억은 선명하지 않다. 그래서 그 말이 더 낯설게 들렸다. 그런데 묘하게도, 이 장면은 요즘 베트남에서는 아주 낯설지 않다.
한국의 ‘기다림’은 규칙이었다
이전 한국에서, 아버지를 기다리는 저녁은 단순한 가족애의 표현이 아니었다. 아버지는 집안의 가장이었고, 가장은 곧 질서의 기준이었다. 아버지가 오기 전까지 밥을 먹지 않는다는 건, 배려라기보다 규칙에 가까웠다. 가장이 자리에 앉아야 밥상이 시작되고, 가장이 수저를 들어야 식사가 시작되며, 가장이 말하면 식탁의 분위기가 정리됐다
이 기다림에는 분명한 위계가 있었다. 아버지는 생계를 책임지는 사람이었고, 그 책임은 권위로 연결됐다. 그래서 기다림은 선택이 아니었다. 안 기다리면 “버릇없다”는 말이 자연스럽게 따라붙었다.
베트남의 ‘기다림’은 상황이다
지금의 베트남에서도 아버지를 기다리는 저녁을 종종 본다. 하지만 그 성격은 한국의 과거와 다르다. 베트남에서의 기다림은 규칙이라기보다 생활 리듬에 가깝다.
아버지가 집안의 주 소득원이고 비교적 일정한 시간에 귀가하며 가족 식사를 중요하게 여기는 경우, “조금 있으면 오니까 같이 먹자”라는 말이 나온다. 중요한 건, 안 기다렸다고 해서 무례가 되지는 않는다는 점이다. 아이가 먼저 먹어도 되고 어머니가 먼저 챙겨 먹어도 되고 아버지가 늦으면 따로 먹기도 한다. 기다림은 강제되지 않는다. 그저 그날의 상황에 따라 선택된다. 베트남 아버지의 위상은 ‘권위’가 아닌 ‘역할’인 것이다.
이 차이를 만드는 건, 아버지의 위상 변화다.
이전 한국의 아버지는 권위 그 자체였다. 말이 적어도 중심이었고, 존재만으로 집안의 축이었다.
반면 지금의 베트남 아버지는 권위보다는 역할 중심에 가깝다. 가족의 생계를 책임지는 역할, 중요한 결정을 맡는 역할, 가족을 대표하는 역할. 그 역할이 클수록 자연스럽게 식사의 시간도 그에게 맞춰진다. 하지만 그건 존중이지, 복종은 아니다.
같은 ‘기다림’, 다른 의미
그래서 같은 장면을 봐도 느껴지는 온도는 다르다.
한국의 과거에서 기다림은 위계의 언어였다. 누가 중심인가를 보여주는 신호였다.
베트남의 현재에서 기다림은 관계의 언어에 가깝다. 함께 먹고 싶다는 선택에 더 가깝다.
우리는 왜 그 장면에서 과거를 떠올릴까?
베트남에서 아버지를 기다리는 저녁을 볼 때, 우리는 종종 말한다.
“우리 어릴 때도 저랬지.”
그 말에는 두 가지 감정이 섞여 있다. 조금은 불편했던 기억과, 조금은 그리운 풍경.
아마도 우리가 떠올리는 건, 아버지 그 자체라기보다 가족이 한 자리에 모이던 시간의 밀도일 것이다. 기다림이 사라진 게 아니라, 그 이유가 바뀐 것이다. 그리고 그 변화의 한가운데에 아버지라는 존재가 있다.
내가 아버지가 된 지금 그 장면을 다시 원하지는 않지만, 그 자리가 갖고 있던 무게만큼은 가끔 생각하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