같은 장소에 서 있어도, 준비된 만큼만 세계는 자신을 드러낸다
대학 4학년 때였다. 개인교습으로 대만 출신 선생님에게 중국어를 배우던 시절이다. 나와 나이가 같았던 그 여 선생님은 한국인과 국제결혼을 해 한국에서 살고 있었다. 수업시간이 아니어도 종종 그 집에 찾아가 마작도 배우고, 술잔을 기울이며 시간을 보냈다. 교실이 아닌 거실에서 배운 중국어는 훨씬 빠르게 몸에 익었다.
어느 날 선생님이 말했다.
“외국어는 실전을 해봐야 빨리 는다.”
그러더니 동남아 6개국 배낭여행 일정을 짜 주었다. 중국어가 통하는 나라들 위주였다. 그렇게 혼자 여행을 시작했다. 첫 행선지는 대만 타이베이였다. 대만이니만큼 일정은 치밀했다.
나는 타이베이에서 시작해 아리산을 오르고, 타이중을 거쳐, 가오슝을 지나 켄팅까지 내려갔다. 지도를 보면 단순히 북에서 남으로 이동한 것뿐이지만, 그 여정은 공간의 이동이 아니라 감각의 변화였다. 타이베이에서는 언어가 현실이 되었고, 타이중에서는 사람들이 살아가는 리듬을 느꼈고, 가오슝에서는 이 섬이 어떻게 세계와 연결되는지를 보았고, 켄팅에서는 마침내 이 모든 것이 하나의 섬 위에 존재한다는 사실을 몸으로 이해하게 되었다. 그렇게 일주일 동안 숨 돌릴 틈 없이 움직였다. 그 여행은 지금도 내 인생에서 가장 강렬한 기억으로 남아 있다.
비오는 거리에서 만나 유스호스텔까지 직접 데려다 준 소녀의 친절함, 우연히 히치하이킹을 하게 되어 아리산을 무료로 오르던 날, 국립공원의 신혼부부들이 내게 건넨 케잌 한 조각 ... 나는 그곳에서 ‘관광지’를 본 것이 아니라, 사람을 보았다. 그리고 그 나라를 이해하기 시작했다.
그래서인지 지금도 대만 손님을 만나면 괜히 하나라도 더 챙겨주고 싶은 마음이 든다. 그때 내가 받았던 환대가 아직도 마음속에 남아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다음 행선지가 태국 방콕이었다. 3박 4일 일정. 문제는 준비가 없었다는 것이다. '방콕이면 사찰 몇 군데 돌고, 주요 관광지만 보면 되겠지.' 라는 정도의 생각이었다. 하지만 공항에 도착하는 순간부터 묘한 불편함이 밀려왔다. 어색함, 경계심, 어디로 가야 할지 모르는 막막함. 준비되지 않은 채 낯선 도시 한가운데 서 있다는 느낌. 호텔 프론트에 부탁해 부른 톡톡이 기사가 오토바이를 몰기 시작하면서 내 눈에 들어 온 것은 교통 십자로에 서 있는 경찰이었는데 권총을 차고 있었다. 톡톡이 기사가 웃으며 던진 방콕은 얼마전에도 총격이 있었고, 경찰은 총도 쏜다는 것이었다. 순간 불안이 엄습했다.
어디를 가야 할지, 가서는 무엇을 봐야 할지 스스로 정하지 못하니, 현지인의 요구와 상술에 끌려다니기 시작했다. 심지어 호텔에서 그날 밤 원치 않는 제안까지 받았다. 결국 이틀 동안 호텔에서 출발하는 하루 일정의 관광코스를 따라 다니고 밤에는 정말 방콕하면서 출발일만을 기다리는 신세가 되었다.
도시는 똑같이 존재하고 있었지만, 나는 그 도시를 읽을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다. 돌이켜 보면, 대만과 태국은 크게 다르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다만 달랐던 것은 나의 상태였다.
대만에서는 일정도 있었고, 배경지식도 있었고, 언어도 준비되어 있었다. 그래서 나는 그 도시가 보여주는 것 이상을 볼 수 있었다. 반면 방콕에서는 아무 준비가 없었다. 그래서 도시가 가진 다층적인 얼굴 대신, 가장 거칠고 즉각적인 표면만 보게 되었다.
그때 처음 알게 되었다. 여행은 떠나는 순간 시작되는 것이 아니라, 이해할 준비가 되었을 때 비로소 열리기 시작한다는 것을. 같은 장소에 서 있어도, 준비된 사람에게는 세계가 이야기를 건네고, 그렇지 않은 사람에게는 그저 낯선 풍경으로 남는다. 그 차이는 도시가 아니라, 여행자의 내면에 있었다.
그 이후로 나는 어디를 가든 먼저 공부하고 간다. 역사를 읽고, 지도를 보고, 자료를 찾는다. 이미 그 도시를 한 번 경험한 사람처럼 준비하려고 한다. 그럼에도 막상 그곳에 도착하면 예상과는 다른 것들이 나를 기다리고 있다. 하지만 이제는 안다. 준비된 사람에게만, 세계는 자신을 조금 더 깊이 보여준다는 것을. 그리고 그때 비로소 여행은 이동이 아니라, 하나의 경험이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