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도시의 전략적 역할과 성격에 따른 피해 비교
얼마 전부터 무료하게 KBS 뉴스로 시간을 보내실 아버님을 위하여 6.25와 월남전에 유행했던 노래들의 영상을 편집해 유튜브에 올리기 시작하였는데, 예상치 못한 관심과 호응을 해 주시는 구독자 분들 때문에 월남전에 대해 다시 한번 관심을 갖게 되었고 자료들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우선 베트남의 정치적 / 경제적 수도로 알려져 있는 하노이와 호찌민시(당시 사이공)의 피해를 비교해 보았다. 내가 알고 있던 바로는 하노이는 미군의 공습으로 완전 쑥대밭이 되어 버렸고, 반면 사이공은 남베트남의 수도이자 강력한 미군의 보호로 거의 피해를 입지 않았다. 실제로 호찌민시의 지금의 시내 모습을 보면 건물들이 바뀐 것이 거의 없어 보인다. 프랑스 식민시절의 모든 건물들과 호텔 등이 모두 그대로 역사를 자랑하며 지금도 영업을 하고 있기 때문에 당연한 진실로 믿고 있었다.
하지만 어디건 전쟁의 화마를 피해 갈 수 있었겠는가! 특히나 당시 두 진영의 수도였는데...
베트남 전쟁 당시 하노이와 호찌민시(당시 사이공)는 서로 다른 전략적 역할과 전쟁의 성격으로 인해 각기 다른 피해 양상을 겪었다. 두 도시는 모두 치열한 전투와 폭격, 그리고 전쟁에 따른 심각한 피해를 입었지만, 지리적 위치와 전쟁의 단계에 따라 피해의 원인과 형태가 달랐다. 아래에서 각 도시의 전쟁 상황과 사상자 및 주요 피해를 비교하여 설명하고자 한다.
1. 하노이: 북베트남의 정치·군사적 중심지
하노이는 북베트남의 수도이자 베트남 전쟁의 북베트남군과 베트남 민족해방전선(베트콩)의 핵심 거점으로, 전쟁 중 북베트남의 정치적·군사적 중심지 역할을 했다. 미국과 남베트남군은 하노이의 전략적 중요성을 약화시키기 위해 대규모 공습을 감행했다.
하노이는 Rolling Thunder 작전(1965~1968)과 같은 미군의 집중적인 공습을 받았다. 이 작전은 북베트남의 군사적·산업적 기반을 타격하기 위해 진행되었고, 민간 시설을 포함한 도시의 인프라가 큰 피해를 입었다. 주요 목표는 군수품 공장, 병참 기지 등 북베트남의 전쟁 수행 능력을 약화시키기 위한 시설들이었고, 민간인 사상자도 상당하게 발생했다.
하노이와 하이퐁 등 주요 도시에 대한 공습으로 인해 수천 명의 민간인이 사망했을 것으로 추정되며, 1972년의 크리스마스 폭격 당시에는 약 1,600명 이상의 민간인 사망자가 보고되기도 하였다. 이는 북베트남의 방공망을 뚫고 B-52 폭격기를 통한 대규모 공습이 이루어지면서 발생한 피해들이다.
미국은 하노이가 북베트남의 정치적, 군사적 중심지이자 주요 전쟁 자원의 생산 기지임을 감안하여 이 지역을 주요 공습 목표로 삼았던 것이다. 소련과 중국이 제공한 방공 미사일 시스템과 전투기 지원에도 불구하고 북베트남은 공습 피해를 피할 수 없었으며, 결과적으로 하노이는 도시 인프라와 민간 시설이 상당히 파괴되는 피해를 입었다.
2. 호찌민시(사이공): 남베트남의 수도이자 전쟁의 최종 목표
한 편, 사이공은 남베트남의 수도이자 미군과 남베트남군의 주요 군사 기지로서 전쟁 초기에는 비교적 안전한 편이었다. 하지만 전쟁 후반으로 갈수록 북베트남군과 베트콩의 공격 목표가 되었다. 사이공은 전쟁이 장기화되면서 전략적으로 중요한 최종 공격 목표가 되었고, 1975년 사이공 함락으로 전쟁이 종결되었다.
사이공의 피해는 하노이와는 다르게 게릴라전과 지상 교전으로부터 주로 발생했다. 1968년 테트 공세 당시 사이공은 베트콩과 북베트남군의 대규모 공격을 받았고, 주요 군사기지 및 사이공 경찰청, 미국 대사관 등에 대한 공격으로 인해 많은 군인과 민간인이 사망하거나 부상을 입었다. 1975년 사이공 함락 당시에는 최후의 교전이 일어났으며, 많은 남베트남군과 민간인이 희생되었다.
테트 공세와 사이공 함락 동안 발생한 군인과 민간인의 사상자 수에 대한 구체적인 자료는 부족하지만, 당시 교전과 폭격으로 인해 다수의 인명 피해가 발생했다. 사이공 함락 후의 혼란 속에서도 민간인 피해가 상당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사이공은 남베트남 정부의 수도로서 전쟁의 종결을 위한 북베트남군의 최종 목표가 되었다. 전쟁 후반부로 갈수록 북베트남군과 베트콩의 공격이 집중되었으며, 사이공이 함락됨으로써 북베트남의 전쟁 승리가 결정되었다. 이는 사이공이 남베트남의 정치적 중심부이자 미국의 군사적 지지의 상징적인 지역이었기 때문에, 북베트남이 이 도시 점령을 통해 전쟁의 종결을 확정하려 한 전략적 결정 때문이다.
하노이와 사이공은 서로 다른 전략적 위치와 전쟁 내 역할을 가지면서, 각기 다른 형태의 피해를 경험한 것이다. 하노이는 미국의 대규모 공습에 의한 피해가 컸으며, 사이공은 지상 교전과 게릴라 공격으로 인해 전쟁 후반부로 갈수록 큰 피해를 입었다. 하노이의 주요 공습 피해는 북베트남의 전쟁 수행 능력을 약화시키기 위한 전략적 결정에 따른 것이었고, 사이공은 전쟁 종결을 위한 북베트남군의 최종 목표가 된 결과로 전쟁의 말미에 대규모 피해를 겪게 된 것이다.
베트남 전쟁 당시 두 도시의 평화로운 시내 영상들을 수집, 편집하면서 1960년대 말에서 1070년대 초 사이 전쟁 중에도 시민들의 환한 웃음에 놀라 했다.
전쟁이란 정말 죽은 자, 산 자 모두에게 씻을 수 없는 슬픔이지만, 그 눈물을 이겨내고 웃기 위해 살아야 하는 하노이 영상에 나오는 광대 같다.
다음에는 베트남 전쟁에서 미군이 강력한 군사력을 갖고도 초기 진압에 실패하고, 장기전에 돌입하고 결국 패배하게 되는 이유에 대해 살펴보고자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