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후에도 계급이 있을까?
해 질 무렵, 국립중앙박물관을 둘러보며 지친 다리를 이끌고 현충원을 다시 찾았다. 사람도 거의 보이지 않고, 가을 끝자락의 기운 때문인지 나무들도 잎을 떨구며 지친 듯 쉬고 싶어 하는 모습이었다. 전체적으로 쓸쓸한 기운이 나를 감싸며, 묘비들 사이를 걷는 내내 생각이 깊어졌다.
전날 밤, 아버님께 월남전 당시 순직하신 부대원 조종사가 계셨는지 여쭤봤다. 아버님은 조용히 한 분을 떠올리셨다. 서울에 계시던 어머님은 그 시절, "전사자가 생겼다"는 이야기에 한 씨라는 성을 듣고 놀라 본부로 달려가셨다고 한다. 아버님이 아니라는 것을 확인하고도 한참을 주저앉아 계실 정도로 충격이 크셨다고 한다. 그분의 얼굴도 본 적 없었지만, 어머님은 지금도 그분의 이름을 기억하신다고 했다. 그 이야기를 떠올리며 묘비 하나하나를 보니, 각 이름이 모두 무겁게 느껴졌다.
묘비들을 바라보며 문득 이런 질문들이 떠올랐다.
'이 많은 호국영령들이 지금도 서울과 한국을 내려다보며 지켜주고 계실까?'
'사후에도 이분들에게 계급이 있을까? 순직한 해를 기준으로 서열이 생기진 않을까?'
'625 때 학도 의용군으로 참전한 학생들은 지금 장교보다 훨씬 나이가 많으신데, 저기서도 선배님이라고 부를까?'
'특전사와 해병대는 저기서도 서로 편을 나눠 논쟁을 벌일까?'
'저기에도 헌병대가 있을까?'
우스운 생각들이 떠올랐지만, 그 질문들 속에 나름의 의미가 담겨 있었다. 그들의 삶과 계급이 죽음 이후에도 어떤 형태로든 이어지고 있을까 하는 질문은, 결국 내가 이 묘비들 속에서 무엇을 보아야 할지에 대한 고민으로 이어졌다.
현충원은 단순히 과거를 기리는 장소가 아니다. 그곳은 우리의 현재와 미래를 연결하는 공간이며, 묘비 하나하나가 고인들의 삶과 헌신을 증명한다. 묘비에 새겨진 이름과 계급은 단순한 정보가 아니라, 그들의 책임과 희생, 그리고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역사적 기록이다.
특히 묘비는 시대적 갈등과 평화의 연결성을 생각해 보게 한다. 월남전, 625 전쟁, 항일투쟁, 그리고 평시 순직자들까지. 각 묘비가 품은 이야기는 우리의 현재를 가능케 한 역사이며, 이를 잊지 않고 후대에 전달해야 할 의무가 있다. 묘비 앞에서 '그들의 희생을 통해 나는 어떤 교훈을 얻고 실천할 수 있을까?'라는 질문을 스스로에게 던지는 일이 중요하다. 현충원은 단순히 과거를 되새기는 장소가 아니라, 더 나은 미래를 향한 다짐의 공간이 되어야 한다.
묘비에 새겨진 계급은 그들의 생전 역할과 책임을 기리는 상징일 뿐, 사후의 평화로운 안식처에서는 더 이상 중요하지 않을 것이다. 나라를 위해 헌신한 그분들이 지금은 모두 평등한 마음으로 함께하리라 믿는다. 그곳에서 그분들은 내가 여기서 살아가는 모습과 생각을 보며 흐뭇해하실지도 모른다.
오늘, 계급이라는 생각을 마음에서 지우기로 했다. 대신 그 이름들에 담긴 삶의 의미와 헌신을 더 깊이 새기기로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