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트남의 전통적 저항 방식과 근대적 민족주의의 결합
베트남의 프랑스 식민 시대는 조선보다 훨씬 앞서고, 상대적으로 긴 시간(1885년~1954년)이었다. '베트남에서도 프랑스 식민지 시대 동안 조선의 3.1 운동과 유사한 민족주의적 독립운동이 있었을까?'라는 의문을 가지고 저항운동에 대해 살펴보았다.
항프(항프랑스) 투쟁은 다양한 형태로 전개되었으며, 특히 베트남의 전통적 저항 방식과 근대적 민족주의가 결합된 사례들이 눈에 띄었다.
프랑스 식민 통치 초기에 베트남 민족은 전통적인 봉기와 저항으로 프랑스에 맞섰다.
- 꽝응아이(Quang Ngai) 봉기 (1885-1889) : 1885년, 응우옌 왕조의 한 왕족인 하멩 데(하이 푸억 황제)가 프랑스에 대항하여 반란을 주도했다. 이는 지방 민병대와 농민들이 주축이 된 전통적 저항 운동이었다. 이 봉기는 결국 프랑스의 무력에 의해 진압되었지만, 베트남인들의 독립 의지는 계속 이어졌다.
- 깐 브엉 운동 (Cần Vương, 1885-1895) : 프랑스 식민지 지배를 종식하고 응우옌 왕조를 복원하려는 운동으로, 판딘퐁(Phan Đình Phùng)과 호앙화탐(Hoàng Hoa Thám) 같은 민족 지도자들이 주도한 운동이었다. 1885년 하멩 데 황제는 프랑스 통치에 대항하여 까인동 칙령을 선포하며 운동이 시작되었는데, 주요 저항은 베트남 전역에서 농민과 관료 계층의 참여로 이루어졌으며, 프랑스군을 상대로 게릴라전이 벌어졌다. 저항 세력은 농민, 지방 관료, 무장 민병대로 구성되었고, 프랑스 통치 기관과 주요 시설에 공격을 가했다.
그러나 프랑스는 군사적, 정치적 압박을 통해 운동을 진압하기 시작했고, 1888년, 하멩 데 황제가 체포되어 알제리로 유배되면서 운동은 급격히 약화되었다. 또한 1895년, 판 딘퐁을 비롯한 주요 지도자들이 사망하거나 진압되며 까인동 운동은 막을 내리게 되었다.
이는 베트남 전통적 민족주의의 대표적 저항 사례로 꼽히며, 10년 이상 지속되었으나 결국 실패로 끝났다.
20세기 초, 조선의 3.1운동처럼 베트남에서도 근대적 민족주의 운동이 형성되며 새로운 방식의 저항이 나타난다.
- 판 보이 쩌우(Phan Bội Châu)의 민족주의 운동 : 1900년대 초반, 판 보이 쩌우(Phan Bội Châu)는 프랑스에 저항하기 위해, 일본의 메이지 유신 모델을 본떠 베트남을 개혁하려는 운동을 주도했다. 그는 베트남 광복회(Vietnam Restoration League) 설립하고, '동유운동(Đông Du Movement)'을 통해 젊은 베트남 청년들을 일본으로 유학 보내 지식을 쌓도록 하였다. 이 운동은 프랑스의 탄압으로 운동은 실패했지만, 근대적 민족주의의 불씨를 남긴다.
- 판 쭈찐(Phan Chu Trinh)의 개혁 운동 : 판 보이 쩌우와 달리, 판 쭈찐은 폭력적 저항 대신 평화적 개혁과 교육을 통한 독립을 주장하면서, 근대 교육과 계몽 활동을 통해 민중을 계몽시키고 프랑스의 간접적 통치를 약화시키려 하엿다.
1930년대에 들어서면서 인도차이나 공산당의 주도하에 대중적 저항운동이 전개된다.
- 응에안-하띤 봉기(Nghệ An-Hà Tĩnh Uprising, 1930-1931) : 1929년 세계 경제 대공황이 베트남에도 영향을 미치면서 농민과 노동자의 삶이 더욱 악화된다. 이에 따라 공산주의 사상을 기반으로 한 대중적 저항이 시작되었는데 이는 프랑스의 식민 통치와 과도한 세금에 반대한 농민과 노동자들이 봉기한 것으로 소련과 중국 공산주의 혁명의 영향을 받았다는 특징이 있다. 프랑스군의 강경 진압으로 수천 명이 사망하거나 투옥되었지만, 이를 계기로 베트남 공산당의 기반이 강화되는 결과를 낳았다.
베트남에서 호찌민의 등장은 민족운동의 전환점이라고 할 수 있다. 20세기 초, 호치민(본명: 응우옌 아이 꾸옥)은 프랑스에서 유학하며 공산주의 사상에 매료되어 국제적인 독립운동을 전개했다.
1930년에는 인도차이나 공산당(ICP)을 결성하고 민족 해방 운동을 주도했다. 1941년에는 '일본과 프랑스의 이중 식민 지배를 종식시키고 독립을 쟁취'한다는 목표를 가지고 베트남 독립 동맹회(비엣민)의 결성한다. 이들은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비엣민은 일본 점령군과 프랑스 통치자들에 동시에 저항하며 독립을 준비했다.
이 결과로, 1945년 8월, 베트남 민주 공화국(북베트남)을 선포하며 프랑스로부터 독립을 선언한다.
베트남의 항프 투쟁은 조선의 3.1운동처럼 외세에 맞서 민족적 자주성을 지키려는 강렬한 독립운동이었다. 초기에는 전통적인 무장 봉기로 시작했으나, 시간이 지나면서 근대적 민족주의와 공산주의 사상이 결합하며 점차 조직적이고 체계적인 저항으로 발전했다. 이 과정에서 베트남 민중은 단순한 생존을 넘어 민족적 정체성을 지키고 독립을 쟁취하는 데 성공했다. 이러한 노력은 베트남 독립의 초석이 되었으며, 현재 베트남 사람들에게도 자부심으로 남아 있는 것이다.
개인적으로, 베트남의 항프 투쟁을 살펴보며 조선과 달리 훨씬 강렬하고 전투적이었다는 사실에 놀랐다. 이는 우리의 독립운동을 돌아보고 배우는 계기가 되었다.
다음 글에서는 베트남 민중들의 투쟁 방식과 그 의미를 더 깊이 탐구해보고자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