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 강렬하고 전투적이었던 이유
베트남의 항프(항프랑스) 투쟁을 살펴보면서 조선의 독립운동과 비교했을 때 '더 강렬하고 전투적이었다' 점에 내면적으로 적잖이 놀랐다.
베트남이 프랑스 식민에 강렬하게 저항하는데에는 역사적, 지리적, 그리고 문화적 배경이 있었다.
베트남은 1000년 이상의 중국 지배, 몽골의 침략, 프랑스 식민 통치, 일본의 점령까지, 오랜 세월 동안 외세로부터 끊임없이 침략을 받아왔다. 이러한 경험은 베트남 사람들에게 '지속적인 저항'과 '독립에 대한 집착'을 심어주었으며, 이로 인해 외세에 대한 저항은 단순한 정치적 목적이 아니라 국가 정체성을 지키기 위한 투쟁으로 자리 잡았던 것이다.
한편, 베트남은 산악 지형과 밀림이 많아 게릴라 전술이 발달할 수 있는 최적의 환경이었다. 항프 투쟁에서도 베트남은 비대칭적 전술을 사용하여 프랑스군에 효과적으로 맞섰다. 예를 들어, 프랑스군은 디엔비엔푸 전투에서 베트남군의 끈질긴 게릴라 전술에 패배하며 물러날 수밖에 없었다. 이러한 게릴라 전술은 이후 베트남 전쟁(제2차 인도차이나 전쟁)에서도 미국을 상대로 큰 효과를 발휘했다.
조선의 3.1운동은 비폭력 만세 운동을 중심으로 진행되었지만, 베트남의 항프 투쟁은 민중의 무장 투쟁과 긴밀히 연결되었다. 특히 농민과 노동자 계층은 프랑스의 착취에 직접적으로 피해를 입었기 때문에 자발적으로 독립운동에 참여했다. 응에안-하띤 봉기는 이러한 민중 저항의 대표적 사례로, 농민들이 세금을 거부하고 프랑스 군대를 공격하는 등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또한 베트남은 20세기 초부터 공산주의를 수용하며 민족 해방 투쟁에 이를 결합시켰다. 호찌민을 비롯한 지도자들은 마르크스주의와 레닌주의를 통해 민중을 결집시키고 조직적인 독립운동을 전개했다. 공산주의 사상은 단순히 독립뿐 아니라 사회적 평등과 경제적 해방을 목표로 삼아, 농민과 노동자 대중의 폭넓은 지지를 받을 수 있었던 것이다. 이는 조선의 독립운동과의 큰 차이점으로, 베트남의 투쟁은 민족적 독립과 사회 혁명을 동시에 달성하려는 목표를 가지고 있었다.
베트남은 독립운동 과정에서 중국, 소련, 그리고 국제 공산주의 세력의 지원을 받았다는 점이 항프랑스 투쟁에 큰 힘이 되었다. 베트남 공산당은 프랑스와 일본에 대항하기 위해 중국 공산당과 협력하거나, 소련으로부터 군사적·재정적 지원을 받는 등 국제적 연대를 적극적으로 활용했다.
베트남의 독립 투쟁은 단순히 정치적 독립을 넘어 외세로부터 완전한 해방과 자주적 국가 건설을 목표로 했다. 프랑스와 일본, 이후 미국에 이르기까지, 베트남은 자신의 독립을 위협하는 모든 외세에 강력히 저항했던 것이다. 특히 베트남 사람들은 자신의 농토를 빼앗기고 생존을 위협받는 상황에서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강한 의지를 보여주었다.
결론적으로 베트남의 항프 투쟁은 단순한 독립운동을 넘어 군사적 저항, 대중적 참여, 이념적 혁명을 포함한 전방위적인 투쟁이었으며, 이는 베트남 사람들이 외세 지배를 단순히 정치적 억압이 아닌 민족 생존의 위협으로 인식했기 때문이다. 이러한 베트남의 투쟁은 지금도 독립과 자주성을 지키기 위한 역사적 교훈으로 남아 있으며, 이러한 투쟁정신은 오늘날에도 국가적 자부심의 중요한 원천 중 하나로 자리 잡고 있다.
하지만 공산당을 중심으로 한 하노이 북부와 상업의 중심이었던 사이공 남부의 투쟁은 투쟁의 강도, 저항 방식, 그리고 인식의 차이에 뚜렷한 차이가 있었다. 다음에는 북부와 남부의 각각 독립운동에서 다른 역할을 수행한 부분에 대해 설명해 보고자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