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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정호 Nov 24. 2024

베트남 항프 투쟁의 두 얼굴

북부와 남부, 프랑스에 맞선 방식의 차이를 이해하다

 베트남 독립운동과 항프 투쟁 과정에서 북부(하노이 중심)와 남부(사이공 중심) 지역 간에는 투쟁의 강도, 저항 방식, 그리고 인식의 차이에 뚜렷한 차이가 있었다. 이는 역사적, 지리적, 경제적 배경에 기인한 것으로, 북부와 남부는 각각 독립운동에서 다른 역할을 수행했다고 볼 수 있겠다. 


 항프 투쟁의 중심은 북부지역이었다. 

 북부는 베트남 민족주의와 공산주의 운동의 중심지로, 호찌민과 베트남 공산당(비엣민)의 본거지 역할을 했다. 그러한 이유로 프랑스와의 주요 군사적 충돌(예: 디엔비엔푸 전투)과 독립운동의 대부분이 북부에서 발생했다. 

 북부는 전통적으로 중앙집권적인 통치 구조를 가지고 있었으며, 민중이 국가적 대의를 위해 결집하는 경향이 강했다. 산악 지대와 험준한 지형은 게릴라 전술을 전개하는 데 유리한 환경을 제공하여, 프랑스군을 상대로 지속적이고 효과적인 저항이 가능했다. 저항 방식에 있어서도 북부는 공산주의 이념과 결합한 조직적이고 체계적인 저항을 전개했다. 비엣민(베트남 독립 동맹회)는 북부 농민과 노동자 계층을 기반으로 강력한 저항 운동을 전개하였으며, 중국과 소련으로부터의 적극적 지원을 받아 군사적 역량을 강화하였다. 


 1945년 8월 혁명을 통해 하노이를 중심으로 베트남 민주 공화국(북베트남)이 수립된 것도 북부 지역의 역할을 보여주는 것이다. 북부 주민들은 프랑스에 대한 저항을 민족적 독립과 사회주의 혁명의 일환으로 인식했으며, 프랑스는 단순히 침략자가 아니라, 베트남의 전통적 자주성을 위협하는 강대국으로 간주한 것이다. 


 반면 상업적 중심지였던 남부는 저항의 양상이 북부와는 사뭇 달랐다. 

 남부는 프랑스 식민지 통치 초기부터 코친차이나로 불리며 직접 통치를 받았다. 이로 인해 프랑스 문화와 경제 체제가 더 깊이 스며들어 있었고, 사이공은 프랑스 식민 행정과 상업 활동의 중심지로, 상대적으로 경제적 발전이 이루어진 지역이었다.

 프랑스의 직접 통치와 상업적 발전은 남부 주민들에게 현상 유지와 프랑스식 근대화를 어느 정도 받아들이게 만들었다. 따라서 민족주의적 저항은 주로 농민과 노동자 계층 중심으로 전개되었으며, 지식인이나 상류층의 참여는 상대적으로 적었다. 또한 남부 지역에서도 독립운동이 전개되었지만, 북부에 비해 덜 조직적이고 분산적인 형태를 띠는 경향이 있었다.

 저항 방식에 있어서도 남부에서는 비폭력적인 저항이나 프랑스 제도 내의 개혁 운동이 두드러졌다. 예를 들어, 사이공에서는 교육을 통한 계몽 운동과 사회적 평등을 요구하는 소규모 시위가 많았다. 남부 농촌 지역에서는 프랑스와 현지 엘리트 계층의 착취에 대한 농민들의 폭동이 간헐적으로 발생했다.


 남부 주민들은 프랑스를 현대 문명을 가져온 존재로 평가하면서도, 그들의 경제적 착취와 사회적 억압에 불만을 가지는 수준에 그쳤으며, 프랑스와의 직접적인 군사적 충돌보다 경제적 자립과 평등을 요구하는 방식으로 저항하려는 경향이 강했던 것이다. 



 북부와 남부의 투쟁 강도에 있어 차이가 형성된 이유로는,

 지리적으로 북부는 산악과 밀림 지대로 프랑스군의 접근이 어렵고 게릴라 활동에 적합한 환경이었지만, 남부는 평야와 도시 중심 구조로 프랑스군의 통제력이 강했다는 점이 남부지역이 프랑스에 직접 대항하는데 제한적이였다고 볼 수 있겠다. 

 정치적으로는, 북부는 전통적 민족주의와 응우옌 왕조의 영향을 이어받아 프랑스에 대한 저항이 더 뚜렷한 반면, 남부는 프랑스 식민지 초기부터 상업적 중심지로 발전하며 서구 문화와 통치 체제에 더 깊이 영향을 받았다는 차이도 있다. 

 경제적인 측면을 살펴보자면, 북부는 농업 중심의 경제 구조로 프랑스의 착취에 대한 농민들의 저항 의식이 강한 반면, 남부는 경제적 기회와 도시화의 혜택을 본 사람들이 많아 프랑스에 대한 저항이 덜 강렬했다고 할 수 있다. 


 프랑스에 대한 저항 과정에서 형성된 북부와 남부의 이러한 인식 차이는 독립 이후 베트남 전쟁(제2차 인도차이나 전쟁)으로 이어졌다. 북부는 공산주의 이념에 기반한 중앙집권적 사회주의 국가 건설을 추구했지만, 남부는 자유주의적이고 시장 중심의 체제를 선호했다. 이 대립은 1975년 북베트남의 승리와 통일 이후에도 지속적으로 사회적 갈등의 배경이 되기도 한다.


베트남의 항프 투쟁에서 북부와 남부는 지리적 환경과 역사적 배경에 따라 다른 역할을 수행했다. 북부는 조직적이고 강렬한 군사적 저항의 중심지였던 반면, 남부는 비폭력적이고 경제적 요구 중심의 저항이 주를 이루었던 것이다. 프랑스 식민통치의 혜택(?)을 받았던 남부 지역과 착취의 대상으로만 여겨진 북부 지역 민중들의 인식차이가 투쟁의 강도와 방식에 차이를 나았고, 이 앙금은 현재에도 내재되어 있는 것이다. 


 다음에는 베트남의 프랑스로부터의 독립이후, 분단된 체제내에서 프랑스 식민세력에 대한 척결 방식에 있어서 북부와 남부의 차이를 살려보고, 한국의 상활과 접목하여 생각해 보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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