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은 것이 아름답다

한국과 베트남 전통문화 속 소박함의 미학

by 한정호

“작은 것이 아름답다.”

학창시절 종교학을 배우면서 소박한 진리처럼 자주 듣곤 한 글귀이다. 처음 이 말을 들었을 때는 단순히 어떤 겸손한 태도를 뜻한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대학 시절, 종교학 수업에서 이 말이 한 권의 책 제목이며, 하나의 사상적 선언이라는 것을 알게 된 순간부터 이 문장은 내 삶속의 자그마한 철학처럼 자리 잡았다.

1973년, 영국의 경제학자 E. F. 슈마허는 《Small is Beautiful》이라는 책을 통해, 인간의 삶보다 우선시되는 경제와 기술 중심 사회에 문제를 제기했다. 그는 “경제는 사람을 위한 것이어야 한다”는 원칙을 바탕으로, 성장과 대량생산이 아닌 ‘작고, 단순하고, 조화로운 것’이 진정으로 인간을 위한다고 보았다. 그는 이 책에서 특히 불교 경제학(Buddhist Economics)이라는 개념을 소개하며, 물질적 풍요보다 정신적 균형과 만족, 소유보다 존재의 가치를 강조했다. 이 내용은 불교뿐 아니라 가톨릭의 공동체 정신, 기독교의 청빈 사상과도 통하며, 종교학 수업에서 자주 인용되곤 했다.

이후 나는, 이 사상이 현실 속 삶에서 어떻게 구현되는가를 생각했고, 그 해답 중 하나를 한국과 베트남의 전통문화 속에서 발견할 수 있었다.


“작은 것이 아름답다”는 말은 단지 어떤 물건의 크기에 대한 판단이 아니다. 그것은 삶을 바라보는 철학이자, 과하지 않음 속에서 진실한 가치를 발견하려는 태도이다.

나는 한국과 베트남에서 각각의 전통문화에 스며든 이 철학을 떠올릴 때, '절제와 자연스러움'이라는 공통된 미적 감각을 마주하게 된다.


■ 한국의 ‘소박함’ – 비움에서 오는 아름다움

한국 전통미의 핵심은 단연 ‘비움의 미학’이다. 이는 도자기, 건축, 복식, 음식 등 거의 모든 문화영역에 깊게 배어 있다.


1.수묵화의 여백

한국의 수묵화는 채움보다 비움을 중시한다. 그려지지 않은 여백은 단순한 공백이 아니라, 상상과 사유의 공간이다. 산과 나무, 사람과 구름 사이 비워둔 공간 속에서 말보다 깊은 감정과 자연의 기운이 흐른다. 이 그리지 않은 미학은 절제와 비움의 철학을 시각예술로 승화시킨 대표적인 예다.

정선 인왕제색도.jpg 겸재 정선의 '인왕제색도'
추사 김정희의 '세한도',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추사 김정희가 그린 '세한도'의 대부분은 ‘공허한 여백’으로 채워져 있다.

눈 덮인 땅, 희미한 하늘, 인적 없는 풍경.

이 비어 있는 공간은 단순한 공백이 아니라, 고립과 고요, 사유와 인내, 그리고 시간의 흐름을 담고 있는 정신적 무대라 할 수 있겠다.


2.백자의 고요함

조선 시대의 백자는 겉보기에 아무런 장식이 없어 보이지만, 바로 그 무늬 없음이 고결한 품위를 드러낸다.

그릇 하나에 담긴 흰색의 깊이, 미세한 유약의 흐름, 둥근 형태의 절제는 욕망을 다스린 미학이다.

백자.jpg 국보 제262호 백자대호(백자달항아리)-우학문화재단 소장

3. 한옥의 자연스러움

한옥은 산과 들을 해치지 않으면서 자연에 순응해 지은 집이다. 풍광을 가두지 않고, 빛과 바람이 자유롭게 흐르게 둔 구조는 ‘작지만 조화로운 삶’의 공간 그 자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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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akaoTalk_20220720_111232867_18.jpg 흥선대원군의 사저. 운현궁(雲峴宮)

흥선대원군의 사저였던 운현궁의 마당은 특별한 장식이 없다. 나무 몇 그루와 우물 하나, 그리고 잘 다져진 흙바닥. 그 위를 덮고 있는 것은 잔잔한 모래 또는 자갈, 무심한 듯 정돈된 그 바닥은 사람과 건물, 자연을 잇는 완충의 공간이 된다.

이 마당이 주는 공간적 여유는 단순한 빈 곳이 아니다. 소리를 머금고, 빛을 반사하고, 발걸음에 따라 시간의 흐름을 느끼게 한다.

한옥은 담장 너머 자연과 교감하기 위해 벽을 낮추고, 실내와 실외를 나누는 경계를 흐리게 했다. 그 중심에 놓인 마당은, 조용한 숨통이자 비워냄의 미학이 깃든 공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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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akaoTalk_20220720_111242118_25.jpg 국립 중앙박물관 야외 공간 낮은 담벼락은 내외의 경계를 최소화했다

4.소반과 장독대의 소박함

매우 단출한 형태의 소반, 장독대는 기능을 넘어선 형태미를 보여준다.

무늬를 덜어내고, 필요한 것만 남긴 물건들 속에 한국인의 미적 가치관이 숨어 있다.

소반의 한 종류 '호족반' : 힘차고 웅장한 곡선미 덕분에 호랑이의 다리를 연상시킨다고 하여 호족반이라 명염

소반(小盤)은 조선 시대 일상생활에서 가장 익숙한 부엌 가구였다. 한 사람이 쓸 만큼 작은 밥상.

무늬를 과감히 덜어내고, 구조적 안정감과 목재의 결을 살린 형태만 남겼다. 이는 기능과 미학의 경계를 허문 디자인이고, 작지만 완전한 세계를 뜻한다.

장독대.jpg 장독대, 다음카페 문예지평 21 장독대 사진 인용

장독은 모두 둥글고 소박하다.

그릇 하나하나가 가진 곡선과 흙의 질감은, ‘조화롭고 자연스러운 것’이 곧 아름답다는 한국인의 정신을 보여준다.


■ 베트남의 ‘소박함’ – 자연과 하나된 생활 감각

베트남 역시 화려함보다는 일상의 따뜻함과 자연의 흐름에 순응하는 삶을 중시해왔다. 유교, 불교, 도교가 혼합된 전통 속에서도 ‘절제와 균형’은 꾸준히 중요한 가치로 남아 있다.


1.대나무와 짚

전통 가옥, 부엌용품, 악기 등 많은 베트남 전통물품은 대나무나 짚과 같은 재료로 만들어졌다. 이 소재들은 구하기 쉽고, 자연으로 돌아가며, 인간의 손에 의해 소박한 조형으로 완성되었다. 기교를 부리지 않고, 구부러짐과 자연스러운 틈마저 그대로 받아들였다. 이런 소품들은 실용성과 심미성을 동시에 지니며, ‘있는 그대로가 가장 완전하다’는 감각을 전달한다.

ChatGPT Image 2025년 6월 2일 오전 10_41_01.png 대나무, 짚을 이용한 상품들

2.수공예 그릇과 바구니

베트남의 전통 그릇이나 뚝배기, 수공예 바구니 등은 질박하지만 손맛이 살아 있는 형태를 가진다. 가공되지 않은 재료 그대로의 결을 살리면서도 균형을 이루는 단순함이 인상적이다.

ChatGPT Image 2025년 6월 2일 오전 10_44_40.png 수공예 바구니와 전통 그릇 이미지

3.시골 음식과 밥상 문화

화려한 진수성찬보다 쌈채소, 소금, 생선 한 마리, 국 한 그릇이 놓인 밥상이 베트남 가정의 전통이었다. 소박하지만 영양이 조화롭고, 자연에서 갓 가져온 재료로 만든 음식에서 ‘자연 그대로를 존중하는 마음’을 느낄 수 있다.

ChatGPT Image 2025년 6월 2일 오전 11_02_08.png 쌈채소와 생선조림으로 조화를 이룬 베트남 서민 식단 이미지


한국과 베트남은 모두 대형화, 산업화, 속도전에 있어 세계의 주목을 받고 있다. 하지만 이러한 경제의 논리와는 거리가 먼 전통적 미감을 품고, 유지하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작고, 단순하고, 자연의 흐름에 순응하며 살아가는 삶. 이것이 바로 슈마허가 말했던 경제 철학 “작은 것이 아름답다”의 아시아적 구현이라 할 수 있지 않을까? 이 가치야말로, 지금 우리가 다시 꺼내 들어야 할 삶의 기준이 아닐까? 라는 생각이 든다.


작고, 오래되고, 소박한 것들 속에는 민족적 진심이 있다. 그리고 그 진심은 조용히 빛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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